시끌벅적한 삶을 살았다. 원래 이렇게 살려고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장애인이 되었다. 내 기억 속에는 없지만, 나만의 기억을 갖기 시작했을 때쯤부터 나는 장애인이었다. 의료사고를 당했고, 대학병원과 의사를 상대로 요란스러운 법정 공방을 다투고 나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장애를 갖게 된 이후로는 한동안 평온했다. 나의 부모는 맞닿은 현실 속에서 체념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더이상 분노하지도, 울지도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악악댈 어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사회에서 완전한 장애인으로 낙인되기까지의 투쟁 과정이 내 삶의 평화였을까, 낙인된 이후 모두가 체념했을 그 상황 이후가 내 삶의 평화였을까. 내게 큰 의문이었다.
두 번째로 평화에 대해 되물었을 때는 한 항공사로부터 탑승을 거부당했을 때였다. 장애인이라서 비행기 탑승을 허락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서약서를 써야만 했다. 내가 죽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으며 모든 승객에게 비행 지연에 따르는 보상을 해주겠다는 서약서에 눈물을 삼키며 서명했다. 나는 그 서약서를 비엔티안 공항의 바닥에서 작성했다. 한국으로 귀국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서명하지 않고서는, 한국에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소리를 지르고 울고불고 태워달라고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내 서약서를 매정하게 가져간 항공사 직원이 떠나고 나서야 공항에는 껍데기뿐인 평화, 아니 침묵이 찾아왔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악악대지 않았으며, 그 어떤 직원도 나를 향해 신경질 내지 않았다. 어떡하면 좋노 하며 나를 바라보던 승객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새벽의 비엔티안 공항에는 한바탕 소란이 가시고, 침묵만이 존재했다. 나는 그렇게 먼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나의 평화는 장애인 차별에 대해 소리 지르던 그 순간이었을까, 체념하고 난 후에야 찾아온 것일까.
평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떠나, 과연 언제 나의 평화가 존재하는가를 되물어도 아직까지 확신이 없다. 불안한 상황에 치달을 때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평화인지, 아니면 그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 침묵만 존재하는 그 시간이 평화인지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 분명 사람들은 평화롭다는 것을 ‘조용하고 침착한 상황’에서 간직할 수 있는 무언가라고 보는데, 내게 있어 ‘조용하고 침착한 상황’은 평화로운 순간이 아니라 체념한 순간을 더 먼저 떠올리게 만들었다. 막막하고 무기력한 침묵만큼 조용하고 침착한 것은 더 없었기 때문이다.
사진 | ⓒ안드레아 거스키 <Rhein Ⅱ>
나를 포함한 우리는 오랫동안 평화를 어떤 갈등 끝에 빚어낸 결과물로 바라보았다. 생존과 투쟁은 평화롭지 못한 상태로 비추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생존과 투쟁의 목소리로부터 멀어졌다. 아니 도리어, 목소리가 남아 있는 사람을 향해 ‘평화롭게’ 살기를 권유했다. 어느새 우리의 시대는 중용을 외쳤고 또 간간이 용서도 외쳤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라고 삶을 가르치는 시에 이르러 사람들이 획득한 것은 평화와 유사한 침묵이었다. 사람들은 값지게 획득한 침묵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에 공감하는 법을 포기해버렸고, 불평등에 대해 저항하는 법을 포기해버렸다. 연대하는 것은 시끌벅적한 일을 만드는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고, 거리로 나온 사람과 굴뚝 위로 오른 사람들을 평화롭지 않고 폭력적인 행동하는 이들로 여기기 시작했다.
침묵이 평화와 동일시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작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태어나지 못해 알 수 없지만, 정태춘과 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만 들어도 한국 사회에 침묵 같은 평화가 찾아온 것이 채 30년이 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말고 기자도 기다리지 말자.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고, 물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며 쓸쓸히 남겨진 종로 바닥을 노래한 이들만 보더라도 침묵이 한국사회의 일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멀지 않았던 과거 언젠가 마침내 ‘평화'를 획득했고, 그 후로 한동안 사람들은 더는 깃발을 들지도 않았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공허한가. 평화의 비둘기가 서울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데 왜 내 가슴은 큰 구멍이 난 것처럼 텅 빈 느낌이 드는 것일까.
사진 | 김슬기 @seulzzangkim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적막한 침묵 속에 둘러싸였을 때 든 생각이었다. 차별에 저항하던 순간이 내 삶에 조각된 평화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내팽개쳐지고 잊기 위해 외면하고 살아온 무음뿐인 과거는 평화로운 것이 아니지 않았을까. 내 마음속은 남아 있는 말들을 뱉어내지 못하고 부글부글 끓고 있지 않았을까. 나는 마음속 분노 앞에 판단력을 잃어 기절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내가 착각 속에 평화를 왜곡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왜 이렇게 모든 저항은 시끌벅적할까. 왜 인류의 평화를 외치는 반전운동은 평화롭게 흘러가지 않는가. 생태계의 평화를 외치는 환경운동은 평화롭게 흘러가지 않는가. 왜 노사의 공존과 평화를 요구하는 노동운동은 평화롭게 흘러가지 않는가. 왜 평화로운 여행을 지향하는 장애인의 이동권 운동은 평화롭지 않은가. 왜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하필 철로를 점거하는 건지, 하필 도로를 통제하고 걷는 것인지, 하필 굴뚝 위에 올라가는 것인지, 하필 포크레인을 막아서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던 그 시기에는 평화의 이중성을 혐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끝나고 평화롭다고 자부하던 내 삶에 허무한 적막감만 돌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나서야 시끌벅적한 그 자체가 평화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평화는 모순 속에서 사투할 때의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평화는 양극단에 놓인 삶의 가치 속에서 이것도 저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의 나에게 존재했던 것이었으며, 평화는 가족과 친구의 슬픔에 공감하여 서러워 엉엉 울고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때 존재하던 것이었다.
평화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었다. 손뼉 치며 부르는 ‘내게 강 같은 평화’와 같이, 평화는 꿈쩍 않는 바위 같은 것이 아니었고, 역동적으로 흐르는 강 같은 것이었다. 평화는 어떤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고, 행위 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평화는 과학적 인과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삶의 모든 순간에서 구성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평화를 얻었다는 표현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평화를 얻기 위한 매 순간의 사투만 존재할 뿐이며, 그때 내 마음속 깊이 들어오는 것이 내가 지향하던 평화 그 자체였다. 돌이켜보면, 시끌벅적한 삶의 매 순간이 평화의 순간이었다.
사진 | 김슬기 @seulzzangkim
변재원의 평화 플레이리스트
John Lennon - Isolation
삶의 덧없음을 깨닫는 순간, 허무함과 불안함 사이에서 위로가 되어주는 곡.
Pink Floyd - Us and Them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가사와 멜로디, 그러나 늘 술기운에 취한 나를 압도시키고야 마는 곡.
윤영배 - 위험한 세계
이보다 더 차분히 그러나 강하게 평화를 노래할 수 있을까. 이 사회의 위험과 소외에 대한 분노와 공감을 일깨우는 곡.
☮ Writer | 변재원
어릴 적 의료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건강보다 우선하여 일단 음주가무를 사랑하는 위험한 인생을 사는 중이다. 동네 술집에서 매일 반복해서 듣던 곡은 존레논의 'Isolation'.
시끌벅적한 삶을 살았다. 원래 이렇게 살려고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장애인이 되었다. 내 기억 속에는 없지만, 나만의 기억을 갖기 시작했을 때쯤부터 나는 장애인이었다. 의료사고를 당했고, 대학병원과 의사를 상대로 요란스러운 법정 공방을 다투고 나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갖게 되었다. 장애를 갖게 된 이후로는 한동안 평온했다. 나의 부모는 맞닿은 현실 속에서 체념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더이상 분노하지도, 울지도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악악댈 어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사회에서 완전한 장애인으로 낙인되기까지의 투쟁 과정이 내 삶의 평화였을까, 낙인된 이후 모두가 체념했을 그 상황 이후가 내 삶의 평화였을까. 내게 큰 의문이었다.
두 번째로 평화에 대해 되물었을 때는 한 항공사로부터 탑승을 거부당했을 때였다. 장애인이라서 비행기 탑승을 허락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서약서를 써야만 했다. 내가 죽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으며 모든 승객에게 비행 지연에 따르는 보상을 해주겠다는 서약서에 눈물을 삼키며 서명했다. 나는 그 서약서를 비엔티안 공항의 바닥에서 작성했다. 한국으로 귀국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서명하지 않고서는, 한국에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소리를 지르고 울고불고 태워달라고 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내 서약서를 매정하게 가져간 항공사 직원이 떠나고 나서야 공항에는 껍데기뿐인 평화, 아니 침묵이 찾아왔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악악대지 않았으며, 그 어떤 직원도 나를 향해 신경질 내지 않았다. 어떡하면 좋노 하며 나를 바라보던 승객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새벽의 비엔티안 공항에는 한바탕 소란이 가시고, 침묵만이 존재했다. 나는 그렇게 먼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나의 평화는 장애인 차별에 대해 소리 지르던 그 순간이었을까, 체념하고 난 후에야 찾아온 것일까.
평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떠나, 과연 언제 나의 평화가 존재하는가를 되물어도 아직까지 확신이 없다. 불안한 상황에 치달을 때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평화인지, 아니면 그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 침묵만 존재하는 그 시간이 평화인지에 대해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 분명 사람들은 평화롭다는 것을 ‘조용하고 침착한 상황’에서 간직할 수 있는 무언가라고 보는데, 내게 있어 ‘조용하고 침착한 상황’은 평화로운 순간이 아니라 체념한 순간을 더 먼저 떠올리게 만들었다. 막막하고 무기력한 침묵만큼 조용하고 침착한 것은 더 없었기 때문이다.
사진 | ⓒ안드레아 거스키 <Rhein Ⅱ>
나를 포함한 우리는 오랫동안 평화를 어떤 갈등 끝에 빚어낸 결과물로 바라보았다. 생존과 투쟁은 평화롭지 못한 상태로 비추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평화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생존과 투쟁의 목소리로부터 멀어졌다. 아니 도리어, 목소리가 남아 있는 사람을 향해 ‘평화롭게’ 살기를 권유했다. 어느새 우리의 시대는 중용을 외쳤고 또 간간이 용서도 외쳤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라고 삶을 가르치는 시에 이르러 사람들이 획득한 것은 평화와 유사한 침묵이었다. 사람들은 값지게 획득한 침묵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에 공감하는 법을 포기해버렸고, 불평등에 대해 저항하는 법을 포기해버렸다. 연대하는 것은 시끌벅적한 일을 만드는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고, 거리로 나온 사람과 굴뚝 위로 오른 사람들을 평화롭지 않고 폭력적인 행동하는 이들로 여기기 시작했다.
침묵이 평화와 동일시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작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태어나지 못해 알 수 없지만, 정태춘과 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만 들어도 한국 사회에 침묵 같은 평화가 찾아온 것이 채 30년이 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말고 기자도 기다리지 말자.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고, 물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며 쓸쓸히 남겨진 종로 바닥을 노래한 이들만 보더라도 침묵이 한국사회의 일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멀지 않았던 과거 언젠가 마침내 ‘평화'를 획득했고, 그 후로 한동안 사람들은 더는 깃발을 들지도 않았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공허한가. 평화의 비둘기가 서울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데 왜 내 가슴은 큰 구멍이 난 것처럼 텅 빈 느낌이 드는 것일까.
사진 | 김슬기 @seulzzangkim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적막한 침묵 속에 둘러싸였을 때 든 생각이었다. 차별에 저항하던 순간이 내 삶에 조각된 평화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내팽개쳐지고 잊기 위해 외면하고 살아온 무음뿐인 과거는 평화로운 것이 아니지 않았을까. 내 마음속은 남아 있는 말들을 뱉어내지 못하고 부글부글 끓고 있지 않았을까. 나는 마음속 분노 앞에 판단력을 잃어 기절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내가 착각 속에 평화를 왜곡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왜 이렇게 모든 저항은 시끌벅적할까. 왜 인류의 평화를 외치는 반전운동은 평화롭게 흘러가지 않는가. 생태계의 평화를 외치는 환경운동은 평화롭게 흘러가지 않는가. 왜 노사의 공존과 평화를 요구하는 노동운동은 평화롭게 흘러가지 않는가. 왜 평화로운 여행을 지향하는 장애인의 이동권 운동은 평화롭지 않은가. 왜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하필 철로를 점거하는 건지, 하필 도로를 통제하고 걷는 것인지, 하필 굴뚝 위에 올라가는 것인지, 하필 포크레인을 막아서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던 그 시기에는 평화의 이중성을 혐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든 것이 끝나고 평화롭다고 자부하던 내 삶에 허무한 적막감만 돌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나서야 시끌벅적한 그 자체가 평화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평화는 모순 속에서 사투할 때의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평화는 양극단에 놓인 삶의 가치 속에서 이것도 저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의 나에게 존재했던 것이었으며, 평화는 가족과 친구의 슬픔에 공감하여 서러워 엉엉 울고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때 존재하던 것이었다.
평화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었다. 손뼉 치며 부르는 ‘내게 강 같은 평화’와 같이, 평화는 꿈쩍 않는 바위 같은 것이 아니었고, 역동적으로 흐르는 강 같은 것이었다. 평화는 어떤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고, 행위 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평화는 과학적 인과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삶의 모든 순간에서 구성되는 것이었다. 마침내 평화를 얻었다는 표현은 사실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평화를 얻기 위한 매 순간의 사투만 존재할 뿐이며, 그때 내 마음속 깊이 들어오는 것이 내가 지향하던 평화 그 자체였다. 돌이켜보면, 시끌벅적한 삶의 매 순간이 평화의 순간이었다.
사진 | 김슬기 @seulzzangkim
John Lennon - Isolation
삶의 덧없음을 깨닫는 순간, 허무함과 불안함 사이에서 위로가 되어주는 곡.
Pink Floyd - Us and Them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가사와 멜로디, 그러나 늘 술기운에 취한 나를 압도시키고야 마는 곡.
윤영배 - 위험한 세계
이보다 더 차분히 그러나 강하게 평화를 노래할 수 있을까. 이 사회의 위험과 소외에 대한 분노와 공감을 일깨우는 곡.
☮ Writer | 변재원
어릴 적 의료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건강보다 우선하여 일단 음주가무를 사랑하는 위험한 인생을 사는 중이다. 동네 술집에서 매일 반복해서 듣던 곡은 존레논의 'Iso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