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평화 ‘하기’ / 김성경

2020-04-13


평화 ‘하기’ / 김성경


 인간 인식의 지평은 시공간성으로 매개된다. 우리가 생각하고, 감각하는 것들은 항상 특정한 시공간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2020년이라는 이 순간, 한반도라는 공간은 사유의 틀이며, 표현의 한계이며, 감정의 규칙이기도 하다. 평화를 사유할 때 한반도의 상황과 역사적 경험을 반추하며 그 상을 그려내며, 평화로운 상태는 지금 우리가 공유하는 감정의 범위 내에서 도출된다. 우리의 평화가 서구인들의 peace와 구별될 수밖에 없고, 같은 문화권이기는 하지만 중화권의 平和 혹은 제국주의를 경험했던 일본의 へいわ 와 같은 결로 해석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한반도에 사는 대부분이 ‘평화’가 무엇인지 사유하지도, 감각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서구의 이론이나 개념을 아무리 들춰보아도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왜일까? 분명히 이 막연함과 모호함은 한반도라는 공간성과 식민-전쟁-분단-정전으로 이어지는 역사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평화’로운 상태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한반도가 여전히 ‘전쟁’ 중이기에 그러하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이래로 잠시 전쟁을 멈춘 상태로 70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도래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총포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모습을 바꾼 전장은 일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남북 모두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면서 독특한 사회체계를 구축하였고,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명분 아래 국가폭력, 사회 통제와 규율, 개인 자유의 제한 등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고 있다.

ⓒ gritte, unsplash


 예를 들어보자.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을 제외하고 가장 성공적으로 바이러스를 대처하고 있는 국가로 한국이 주목받는 것은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바이러스에 맞서 빠르게 전 국민의 이동권을 제한하고, 확진자와 접촉했던 사람들의 동선 추적과 집단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의 명단 입수 등이 그토록 일사불란하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라도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한 국가 체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갑작스레 쏟아진 확진자 중 수천 명에 이르는 경증 환자를 분리하여 치료·관리할 수 있는 공간(국가 및 기업 교육원, 집단교육을 위한 교육시설 등)이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많이 ‘준비’되어 있는 국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이는 전쟁을 경험했고, 아직도 정전상태인 한국에서 ‘집단주의’적 습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체계가 세밀하게 조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공공의료를 대표하는 국민건강보험 또한 박정희 시대에 북한의 무상의료와 경쟁하기 위해 시작된 체계라는 점도 되새겨봄 직하다. 항상 ‘전쟁’을 준비해온 비정상적 체계의 국가가 바이러스라는 갑작스러운 전쟁에서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 팬데믹에서 선방하고 있는 한국의 민낯은 전시 준비체계를 내재화한 사회 시스템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정전체제에서 개인의 자유는 국가적 위기상황이라는 이름 아래 언제든지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받아 왔다. 일상에 만연한 폭력과 억압 또한 ‘문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기 일쑤다. 이런 상황에서 2018년 남북의 정상이 만나 갑작스레 한반도의 ‘평화’, ‘평화협정’ 등의 약속을 쏟아내었을 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이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온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이행될 가능성은 더 나은 미래로의 전환으로 감각되기 보다는 안정적인 ‘현실’의 요동침으로 반응하기까지 했다. 평화라는 것이 두려움으로 느껴질 때 실천에 나서기란 더더욱 어렵다. 게다가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점차 어려워지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회의적인 여론을 되돌리기 위해 통일이 경제적 이득이 있다는 논리가 정부를 중심으로 확산된 것은 우리 손에 쥐어진 ‘평화’라는 의미 속의 빈약함을 드러낸다. 북조선과의 화해 협력이 ‘공산당에게 먹히는 것’이라고 해석하거나 아니면 북조선을 우리가 ‘접수’해서 ‘돈을 벌자’라는 사고방식이라니. 그것이 2018년 한반도 대전환의 기회에서 평화를 감각하는 방식이었다. 국민 대부분이 평화라는 시대적 화두에 감흥하지 못한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만큼 정전체제가 기준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지금까지 당연시 여겨온 것들을 해체하고 새로운 가치와 삶의 방식을 이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 만족하면서 그냥 이렇게 살면 그만일까? 정전체제에 코로나 팬데믹 사태까지 점차 비대해질 수밖에 없는 국가 그리고 권력에 순종하며 그렇게 말이다. 세금으로 무기를 사고, 군대에 가며, 폭력적인 의식과 감정을 공유하여 피아라는 구분 선으로 서로 적대하는 세계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혐오하며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보다는 현상유지에 급급해하며 사는 것 말이다. 한반도의 정전체제는 국가 수준에서의 ‘전쟁’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에서도 ‘전쟁’을 계속하게 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평화의 의미는 ‘전쟁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안녕감과 공동체적 연대감의 다른 이름이 분명하다. 그만큼 한반도에서의 평화는 지금까지 익숙한 대부분의 문화적 문법과 사회적 규칙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 적대와 경쟁이 아닌 사랑과 공존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창출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 한반도에서 평화란 잠깐의 해빙기를 지나 다시 꽁꽁 얼어버린 남북관계를 진척시키는 것이다. 전쟁, 군사, 무기, 전시동원, 국가 권력, 폭력 등이 계속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정전체제’의 문화를 해체하는 것이며, 여전히 계속되어 온 이데올로기적 적대와 정치 분열을 뛰어넘는 일이다. 타자를 배제하고 적대하는 습성을 해체하는 것이며, 생존과 경쟁이 만들어진 신화임을 간파하고 주변과 연대하여 함께 살아가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평화는 거대서사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는 각자의 자리에서 수백 가지, 수천 가지의 모습으로 가시화된다. 각각의 힘이 설혹 작아 보이더라도, 그것들이 하나둘씩 모인다면 우리를 그토록 괴롭혔던 정전체제에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다.


ⓒ peacetrain


 2020년 여름, 우리 모두 ‘피스트레인’에 올라보자. 한반도의 분단이 그대로 박제된 공간 철원에서 모여 사랑, 연대, 공존 등의 가치를 함께 외쳐보는 거다. 며칠이나마 평화로운 삶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음악과 함께 나눈 각자의 평화와 사랑을 일상으로 가져와 조금씩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는 평화임에 분명하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역사 기억과 전쟁과 같은 현재로 인해 평화를 사유하지 못한다면, 잠시만이라도 자연과, 가족과, 친구와, 그리고 타자와 함께 ‘하기’에 나서보자. 적대와 파괴의 관계가 아닌 공존과 상생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평화 ‘하기’에 다름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의 평화 ‘하기’가 만들어내는 힘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분단 없는 ‘미래’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 Writer | 김성경


김성경은 분단을 연구하는 문화사회학자이다.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의 사회문화를 가르치고 연구한다. 대중문화, 영화, 음악을 좋아하며, 때로는 연구 자료로 활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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