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페스티벌다운 페스티벌의 부활

2019-07-04

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페스티벌다운 페스티벌의 부활

2회 맞은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2019-06-14

원문보기 | http://weekly.donga.com/3/all/11/1760950/1



해가 뜨면 더웠고 비가 내리면 추웠다. 따뜻함과 서늘함보다 더위와 추위의 날씨였다. 6월 초순의 강원 철원은 그랬다. 이곳의 많은 군인은 이런 날씨에 일희일비하겠지만 6월 7일부터 9일까지 철원 고석정에 모인 사람들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지난해 이맘때에 비해 더 많은 사람이 더 활짝 웃으며 철원에서의 주말을 보냈다. 올해로 두 번째 행사를 치른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피스트레인)의 풍경은 마냥 밝았다.

지난해 봄 피스트레인이 처음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대와 두려움이 반반이었다. 세계 최대 페스티벌인 글래스턴베리페스티벌의 기획자가 참여했다는 이야기에 신뢰가 갔지만 장소가 철원이라는 사실이 두려웠다. 군사지역이라는 이미지가 주는 황량함은 허허벌판에서 열리는 행사를 떠올리게 했고, 편의시설을 비롯한 인프라의 부재가 걱정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행사가 열리는 고석정랜드에 도착한 순간, 그런 우려는 싹 사라졌다. 서울올림픽 기념비가 버젓이 남아 있는 낡은 유원지는 오히려 페스티벌에 최적화된 공간이었다. 잔디광장과 돌광장에 각각 설치된 무대 사이에는 편의점과 깨끗한 화장실은 물론이고 민물매운탕, 산채정식 등을 파는 토속음식점까지 자리해 일품이었다. 비경을 간직한 고석정 계곡의 맑디맑은 공기가 미세먼지에 찌든 폐를 세척해주는 기분이었다. 열악한 화장실과 비싸고 맛없는 음식에 익숙해진 기존 페스티벌의 기억을 날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페스티벌 고어’가 돌아오다


그뿐 아니었다. 다른 음악 페스티벌처럼 이름값, 또는 유행에 따라 무대에 서는 팀이 아니라 지금 한국 음악계에서 충분한 의미를 가진 팀이 무대를 채웠다. 무엇보다 뭔가를 ‘소비’하려고 페스티벌을 오는 이들이 아닌, 페스티벌 자체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이 현장을 가득 메웠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당연하던 분위기가 고석정랜드를 채웠다. 서비스 제공자와 공연자, 소비자가 존재하는 상업적 페스티벌이 아닌, 일시적 문화공동체로서 페스티벌이 첫 피스트레인이었다. 그러니 ‘내년엔 누가 올까’보다 ‘내년에도 열렸으면 좋겠다’는 근본적 바람이 모두에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6월 8일과 9일 이틀에 걸쳐 두 번째 피스트레인에 머물렀다. 8일 오후 도착하자마자 놀랐다. 지난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현장을 메우고 있었다. 무대 앞 돗자리 존은 물샐틈없었고 이곳저곳에 배치된 의자도 빈자리가 없었다. 첫해 행사의 좋은 반응이 1년 동안 축적돼 입소문으로 번진 결과였을 테고, 또한 지난해보다 쏠쏠해진 라인업도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총 30여 개 팀의 라인업은 크게 셋으로 분류된다. 잔나비, 혁오, 술탄 오브 더 디스코, 킹스턴 루디스카 등 페스티벌의 전통적 강자와 지금 가장 ‘핫’한 뮤지션이 첫 번째다. 엘리펀트 짐(대만), 구암파라 뮤직(쿠바), 루시 투(일본) 등 해외 현지 마니아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뮤지션이 두 번째다. 그리고 정태춘과 박은옥, 벨벳 언더그라운드 초기 멤버였던 존 케일, 중국 록의 대부 최건으로 구성된 레전드까지, 다른 국내 페스티벌에서는 볼 수도 없고 짤 수도 없는 라인업이다.

외졌지만 쾌적한 분위기에 상업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라인업까지 더해졌으니 ‘선수’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10여 년간 국내외 페스티벌이나 공연장에서 종종 눈을 마주치고 몸을 부딪쳤지만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 ‘페스티벌 고어’(festival-goer·페스티벌 열성 마니아)를 대거 만날 수 있었다. 퇴역한 전우를 만난 듯했다. 글래스턴베리페스티벌부터 서머소닉까지 각국의 페스티벌 티셔츠를 입은 그들과 함께 공연을 보고 술을 마셨다.


상업주의에 물들지 않은 청정 페스티벌


무엇을 볼까 고르게 되는 여느 페스티벌과 달리 피스트레인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생소한 팀이기 때문이다. 선입견 없는, 발견의 재미다. 대만의 매스 록 밴드 엘리펀트 짐, 일본 여성 밴드 루시 투 등은 여성이 기존 남성문화를 모방하는 것을 넘어 자신들만의 음악적 문법을 만드는 것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 추세임을 확인케 하는 시간이었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핫한 밴드인 잔나비는 가장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무대 앞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의 팬임을 확인한 순간, 그들은 마치 단독 공연을 방불케 하는 무대를 펼쳤다. 첫날 마지막을 장식한 혁오가 ‘TOMBOY’와 ‘위잉위잉’을 부를 때는 엄청난 떼창이 철원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역시 정태춘과 박은옥의 공연이었다. 오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잠시 그치더니 저녁 7시 반 데뷔 40주년을 맞이한 이 부부의 공연 시작과 함께 다시 떨어졌다. 자리를 피하려던 관객들은 정태춘이 첫 곡으로 ‘민통선의 흰나비’를 부르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 집중할 수밖에 없는 울림이자 왜 지금 여기서 이들이 공연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지금 여기서 이 공연을 봐야 하는지를 묵직하게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시인의 마을’ ‘정동진 3.’ 등 한 시간에 걸쳐 명곡을 잔잔히 흘려보냈다.

그리고 마지막 곡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시작됐을 때 잠시 멈췄던 비가 또 내리기 시작했다. 2016년 겨울, 광장에서 단출한 연주로 들었던 이 노래를 2019년 초여름, 민통선 바로 아래서 풀 밴드 편성으로 다시 듣는 건 초월적인 경험이었다. 가사와 선율에 들어찬 시대정신이 마치 죽비처럼 마음을 내리친 것이다. 피스트레인이 아니고서야 어떤 페스티벌이 이 둘을 섭외할 엄두를 낼 수 있을까. 그것도 이 황금시간에 무대에 세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다른 여름 페스티벌을 떠올렸다. 과도한 상업주의에 물들어 ‘서비스’와 ‘소비자’만 남은, 이권다툼으로 망가져버린, 욱일승천기를 두른 일본인과 성형 관광차 한국에 온 중국 부유층이 VIP석을 차지해버린, 그런 페스티벌이라는 이름의 비즈니스를 말이다. 나는 그런 행사를 위해 더는 더위를 무릅쓰고 주말을 바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갈수록 뜨거워지는 한반도 여름이 시작되기 전, 페스티벌로서의 페스티벌이 다시 우리에게 생겼기 때문이다.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 noisepop@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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