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로 번역하면 ‘평화의 조각’이려나? Peace Piece. 라임(rhyme)이 마음에 드는 제목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연주곡인데, 그는 아무도 없는 겨울의 뉴욕 거리를 걷는 상상을 하며 이 곡을 녹음했다고 한다. 왼손으로 규칙적인 코드를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분방하게 높은 음역의 화음을 구슬처럼 굴리다 끝내 깨뜨리는 ‘Peace Piece’는 과연 눈 내린 겨울날처럼 시리고 투명하게 반짝인다.
‘Peace Piece’의 녹음 일화를 듣고 생각했다. 야, 너두? 야, 나두. 혼자일 때 평화롭다고 느낀 빌 에반스에 공감할 수 있다. 나 역시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된다. 이점에는 1인 가구가 유리하다. 혼자 산지 5년 차, 지금 삶에 퍽 만족한다. 특히 지금 집에 이사 온 뒤 만족도가 크게 높아졌다. 지금은 이전 집과 달리 비도 안 새고, 단열 및 소음 차단 기능도 그럭저럭 괜찮으며 햇빛도 잘 드니까. 5.4평,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늘어질 수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창 너머 햇볕을 쬐며 편안한 의자에 몸을 기댈 때, 커피 한잔하며 그때의 무드에 맞는 음악을 들을 때, 노트북으로 유튜브 보며 낄낄댈 때 기력은 다시 차오른다.
그러나 이것은 휴식에 국한된 이야기다. 인생 전반으로 확장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인생은 혼자서만 살 수 없으니까. <나는 전설이다>와 같은 좀비 아포칼립스 상황을 상상해보자. 지구상에 지적생명체는 나 혼자뿐인 상황에서는 평화로움보다 외로움과 막막함이 앞설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도 고독과 권태를 견디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를 대상에게 날마다 메시지를 송출한다. 그나마 자신을 따르는 개가 곁에 있어 다행이(었)다. <캐스트어웨이>의 주인공은 개도 없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져 가까스로 생존한 그의 곁에는 오직 배구공뿐. 그는 공에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끊임없이 말을 건다. 너무 말을 안 해 입에 거미줄 치는 일 없게끔 돕고, 즐거운 순간과 위로가 필요한 시기에 함께 하는 존재는 자기 몫의 삶을 완주하는 데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예시다. 나는 이들과 같은 집에 살고 싶지는 않지만 가까이서 살고 싶다.
우원재가 피쳐링한 기리보이의 ‘후레자식’은 이런 존재를 찬양하는 노래다. 나른한 오후를 떠올리게 하는 리듬과 선율 위에 그는 랩을 얹는다. 미세먼지 때문에 대기가 나쁘고, 한남대교가 꽉 막힌 짜증 나는 상황을 두고서 “다행이야”라고 읊조린다. 미세먼지 지수 높은 날은 유명인인 자신도 연인의 손을 편히 잡을 수 있고, 길이 막힐 때는 한 손으로 느긋하게 운전하며 나머지 손으로 연인과 이어지기 때문이란다. 이 노래는 연인을 향하지만(부모보다 연인이 우선이라는 내용의 곡이라 제목이 ‘후레자식’이다) 이런 관계가 꼭 연애라는 형식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짜증 나는 상황에서도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게 되고, 분노를 유발하는 자들에 대해 함께 욕하며 감정을 해소하고, 질시보다는 진심으로 서로의 행복을 축복하는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공감하거나 새로이 배우면서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에 속할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인생 아닐까.
사진 | 김슬기 @seulzzangkim
나는 한국 사회가 그런 관계를 더욱더 쉽고 폭넓게 맺도록 돕는 곳이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생존 경쟁이 완화돼야 할 것이다. ‘능력’을 갖춰 경쟁에서 이기면 모든 것을 갖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나머지는 모멸감과 불안감에 내모는 사회에서는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구성원을 불행하게 하기 쉽다. 타인을 동료나 친구 보다 경쟁자로 보게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여유나 윤리적 성찰 따위는 사치로 느끼게끔 하는 사회. 오로지 살아남는 데 정신과 역량을 집중시키는 환경은 서로에게 잔인하게, 또는 무신경하게 상처를 주고받게끔 한다.
우리는 모두 지금의 사회 시스템에, 현대 문명에 단단히 얽혀있다. 좋든 싫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고,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교류는 지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방에 처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는 히키코모리로 산다고 해도, 가스와 전기와 수도는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에도 인간의 노동은 투입된다. 또한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배달 주문으로만 조달한다 해도, 그 물건이 내게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했음은 지워지지 않는 사실이다. 언젠가 한 번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존재,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만날지도 모르는 존재, 그렇게 살아있는 동안 서로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주고받는 존재의 손자국들. 이 점에 대해 골몰하다 보면, 동시대에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 대단한 인연이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러니 나 홀로 평화의 순간을 누리는 걸로는 부족하다 말할 수밖에. 불안과 고통으로 영혼이 잠식되지 않게, 삶에 필수적인 요소는 구성원 모두에게 기본으로 제공되는 공동체를 상상한다. 약한 자가 힘 센 자에게 자기 몫을 빼앗기는 일이 없는 사회를 욕망한다. 우리가 친구, 연인, 가족에게 마음 쓰듯 다른 사회구성원의 슬픔과 고통을 염려하고 공감한다면, 이를 북돋는 환경을 조성한다면 가능한 일이라 믿는다. 우연한 일로 삶이 추락하더라도 밑바닥이 아득하지 않도록 확충하는 사회안전망은, 나를 포함한 보편의 사람들에게 이득이 될 것이기도 하다. 모두가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게끔 보듬는 세계. 이런 세상을 꿈꾸는 이들과 다 함께 부르고픈 노래는 역시, ‘다시 만난 세계’이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제 안녕!”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최서윤의 평화 플레이리스트
Bill Evans - Peace Piece
기리보이 - 후레자식(feat.우원재)
소녀시대 - 다시 만난 세계
☮ Writer | 최서윤
직장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를 소개할 때마다 난처하다. 내 경우, 가지가지 하며 살아왔는데 그 중 뭐 하나 뚜렷하게 내세울 게 없어서 더 그렇다. 창간한 《월간 잉여》는 휴간 중이고, 기획· 개발한 보드게임 <수저게임>은 생산 중단됐다. 그래도 글을 납품하고 단편영화를 연출하는 일은 계속 이어오고 있다. 의미 있고 재미도 있는 콘텐츠에 관심 많다. monthlyingyeo@tistory.com
우리말로 번역하면 ‘평화의 조각’이려나? Peace Piece. 라임(rhyme)이 마음에 드는 제목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의 연주곡인데, 그는 아무도 없는 겨울의 뉴욕 거리를 걷는 상상을 하며 이 곡을 녹음했다고 한다. 왼손으로 규칙적인 코드를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분방하게 높은 음역의 화음을 구슬처럼 굴리다 끝내 깨뜨리는 ‘Peace Piece’는 과연 눈 내린 겨울날처럼 시리고 투명하게 반짝인다.
‘Peace Piece’의 녹음 일화를 듣고 생각했다. 야, 너두? 야, 나두. 혼자일 때 평화롭다고 느낀 빌 에반스에 공감할 수 있다. 나 역시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충전된다. 이점에는 1인 가구가 유리하다. 혼자 산지 5년 차, 지금 삶에 퍽 만족한다. 특히 지금 집에 이사 온 뒤 만족도가 크게 높아졌다. 지금은 이전 집과 달리 비도 안 새고, 단열 및 소음 차단 기능도 그럭저럭 괜찮으며 햇빛도 잘 드니까. 5.4평,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온전히 늘어질 수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창 너머 햇볕을 쬐며 편안한 의자에 몸을 기댈 때, 커피 한잔하며 그때의 무드에 맞는 음악을 들을 때, 노트북으로 유튜브 보며 낄낄댈 때 기력은 다시 차오른다.
그러나 이것은 휴식에 국한된 이야기다. 인생 전반으로 확장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인생은 혼자서만 살 수 없으니까. <나는 전설이다>와 같은 좀비 아포칼립스 상황을 상상해보자. 지구상에 지적생명체는 나 혼자뿐인 상황에서는 평화로움보다 외로움과 막막함이 앞설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도 고독과 권태를 견디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모를 대상에게 날마다 메시지를 송출한다. 그나마 자신을 따르는 개가 곁에 있어 다행이(었)다. <캐스트어웨이>의 주인공은 개도 없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져 가까스로 생존한 그의 곁에는 오직 배구공뿐. 그는 공에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끊임없이 말을 건다. 너무 말을 안 해 입에 거미줄 치는 일 없게끔 돕고, 즐거운 순간과 위로가 필요한 시기에 함께 하는 존재는 자기 몫의 삶을 완주하는 데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예시다. 나는 이들과 같은 집에 살고 싶지는 않지만 가까이서 살고 싶다.
우원재가 피쳐링한 기리보이의 ‘후레자식’은 이런 존재를 찬양하는 노래다. 나른한 오후를 떠올리게 하는 리듬과 선율 위에 그는 랩을 얹는다. 미세먼지 때문에 대기가 나쁘고, 한남대교가 꽉 막힌 짜증 나는 상황을 두고서 “다행이야”라고 읊조린다. 미세먼지 지수 높은 날은 유명인인 자신도 연인의 손을 편히 잡을 수 있고, 길이 막힐 때는 한 손으로 느긋하게 운전하며 나머지 손으로 연인과 이어지기 때문이란다. 이 노래는 연인을 향하지만(부모보다 연인이 우선이라는 내용의 곡이라 제목이 ‘후레자식’이다) 이런 관계가 꼭 연애라는 형식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짜증 나는 상황에서도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게 되고, 분노를 유발하는 자들에 대해 함께 욕하며 감정을 해소하고, 질시보다는 진심으로 서로의 행복을 축복하는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공감하거나 새로이 배우면서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에 속할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인생 아닐까.
사진 | 김슬기 @seulzzangkim
나는 한국 사회가 그런 관계를 더욱더 쉽고 폭넓게 맺도록 돕는 곳이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생존 경쟁이 완화돼야 할 것이다. ‘능력’을 갖춰 경쟁에서 이기면 모든 것을 갖는 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나머지는 모멸감과 불안감에 내모는 사회에서는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구성원을 불행하게 하기 쉽다. 타인을 동료나 친구 보다 경쟁자로 보게 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여유나 윤리적 성찰 따위는 사치로 느끼게끔 하는 사회. 오로지 살아남는 데 정신과 역량을 집중시키는 환경은 서로에게 잔인하게, 또는 무신경하게 상처를 주고받게끔 한다.
우리는 모두 지금의 사회 시스템에, 현대 문명에 단단히 얽혀있다. 좋든 싫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고,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교류는 지속되고 있다. 예를 들어, 방에 처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는 히키코모리로 산다고 해도, 가스와 전기와 수도는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에도 인간의 노동은 투입된다. 또한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배달 주문으로만 조달한다 해도, 그 물건이 내게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했음은 지워지지 않는 사실이다. 언젠가 한 번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존재, 지금까지 만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만날지도 모르는 존재, 그렇게 살아있는 동안 서로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주고받는 존재의 손자국들. 이 점에 대해 골몰하다 보면, 동시대에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 대단한 인연이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러니 나 홀로 평화의 순간을 누리는 걸로는 부족하다 말할 수밖에. 불안과 고통으로 영혼이 잠식되지 않게, 삶에 필수적인 요소는 구성원 모두에게 기본으로 제공되는 공동체를 상상한다. 약한 자가 힘 센 자에게 자기 몫을 빼앗기는 일이 없는 사회를 욕망한다. 우리가 친구, 연인, 가족에게 마음 쓰듯 다른 사회구성원의 슬픔과 고통을 염려하고 공감한다면, 이를 북돋는 환경을 조성한다면 가능한 일이라 믿는다. 우연한 일로 삶이 추락하더라도 밑바닥이 아득하지 않도록 확충하는 사회안전망은, 나를 포함한 보편의 사람들에게 이득이 될 것이기도 하다. 모두가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게끔 보듬는 세계. 이런 세상을 꿈꾸는 이들과 다 함께 부르고픈 노래는 역시, ‘다시 만난 세계’이다.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제 안녕!”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나의 세계.”
Bill Evans - Peace Piece
기리보이 - 후레자식(feat.우원재)
소녀시대 - 다시 만난 세계
☮ Writer | 최서윤
직장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를 소개할 때마다 난처하다. 내 경우, 가지가지 하며 살아왔는데 그 중 뭐 하나 뚜렷하게 내세울 게 없어서 더 그렇다. 창간한 《월간 잉여》는 휴간 중이고, 기획· 개발한 보드게임 <수저게임>은 생산 중단됐다. 그래도 글을 납품하고 단편영화를 연출하는 일은 계속 이어오고 있다. 의미 있고 재미도 있는 콘텐츠에 관심 많다. monthlyingyeo@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