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읽기, 박살 에너지, 평화 / 김복희

2020-06-08


읽기, 박살 에너지, 평화 / 김복희


 내가 위협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았던, 이른 바 평화로운 장면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다. 사자와 양이 한가로이 뛰노는 가운데 책을 읽고 있는 사람, 이라든가 사랑하는 이와 느슨하게 누워 각자 보고 싶은 책을 보다가 누가 먼저 말을 꺼내면 이어지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대화를 간헐적으로 이어간다든가, 이런저런 설명하기 어렵고 가늠하기 힘든 마음 아픈 일을 두고도 ‘나 지금 책 읽느라 그런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거든’ 하면서 책을 들고 시간과 공간의 방으로 가버리는 것 말이다.


 나는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나 노화도, 보길도, 고금도에서 유년을 보냈다. 말을 떼고 한글을 익히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약 10여 년 가량이다. 집 가까이에 또래 친구들이 살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이로서 내 시간은 거의 마루에 엎드려 책을 보다가 지나갔다. 게다가 어린 여자아이 혼자 대문 밖에 나가는 것은 금지 사항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개인적인 내 평화의 한 장면은 다음과 같다.


 그림자도 한 점 없는 한낮 초록색, 오로지 벌레 소리 가득하고 인간의 침묵이 가득한 뜨거운 여름 오후와 모기향, 회전하는 선풍기 머리, 내가 아끼던 책의 표지들과 너무 많이 읽어서 택배용 테이프를 덕지덕지 바른 동화책 몇 권, 동화책에 딸린 카세트테이프 같은 것들.


 저 장면을 누리기 위해 먼저 해야 했고 또 좋아했던 것은 쇼핑이었다. 주말마다 엄마 아빠와 때마다 살던 작은 섬에서 배를 타고 본 섬인 완도에 갔다. 매주 완도 할머니 댁에서 하루나 이틀을 자고 오는 길에 섬에서 하나뿐인 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가끔은 두 권) 샀다. 나는 공들여 아주 성심성의껏 책을 골랐다. 집에 있는 것과 겹치지 않으면서 일주일 동안 내내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배 탈 시간에 쫓겨 마음에 꼭 맞지 않는 책을 고를 때도 있었지만 거의 그 서점에서 고른 책은 내 일주일의 전부였기에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댁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할머니 죄송해요. 정말로 기억이 안 나요.) 할머니 댁에서 나와 배를 타러 가기 전에 세상없어도 들렀던 완도군 완도읍의 ‘국제서림’에 대한 기억만은 생생하다.


 그 시간이 내게 얼마나 강렬했던지, 결국 나는 누군가가 쓴 것을 읽기만 하면 지금 이 세계에서 언제든지 다른 세계로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가장 빠르고 강렬하게 평화를 느낀다. 누군가 정성을 들여 구성해 놓은 활자의 나열을 따라가며 읽는 것은 나로 하여금 신경 안정제나 술, 담배, 초콜릿보다 더 쉽고 편하게 제약 없이 다른 세상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사실을 알아낸 후로는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미성년자일 때는 국어 문제집의 지문에서 평화를 찾기도 했으니까 말 다 했다.) 그러니까 내게는 나만의 피난처나 안식처가 있다는 느낌이 평화이며, 그것을 누리게 해주는 것이 책 읽기이기에, 평화와 책 읽기는 떼려 해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김복희


 평화와 책 읽기가 연결된다는 말은 얼핏 보면 평화에 관한 가장 상상하기 어렵지 않은 상식적 이미지다. 이는 책 읽기가 여유나 휴식을 보장하며, 여유나 휴식이야말로 평화라는 모종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내게 책 읽기는 여유나 휴식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책 읽기는 피난처나 안식처의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그것만이 책 읽기의 전부는 아니다. 책 읽기의 가장 큰 역할은 피난처나 안식처가 있을 거라는 느낌을 읽기도 전에 주는 것이다.) 책 읽기는 노동이며 매일을 살게 해주는 식사나 물 마시기와 같은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평화는 일상으로부터의 외유에 있지 않고, 일상을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행위로부터 탄생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평화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에너지를 얻고 도로 이 지지부진한 세상을 견고하게 만드는 그런 휴식이 아니다. 내게 있어서 평화는 지금은 아니더라도 꾸준하게 모여 결국에는 세상을 바꾸는 혁명적 경험에 가깝다. 일단, 지금은 사라진 완도군 완도읍의 ‘국제서림’의 기억이 내게 그런 것과 같고, 거기서 사 온 책을 읽던 마루 위 엎드린 작은 몸이었던 유년의 기억이 그렇다. 책은 얼어붙은 정신, 내면, 혹은 감수성의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살짝 기대어 표현하자면, 책 자체가 그 같은 박살 에너지를 갖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박살 에너지를 생성해 낸다. 그게 어떤 책이든 말이다. 이를테면 전동 드릴 설명서라도 말이다. 책 읽기라는 행위가 곧 평화로의 돌진이기 때문이다. 내가 매일매일 책 읽기를 수행하는 순간 이미 나라는 바다는 무섭게 몰아치는 폭풍을 품은 물방울 자체일 것이다.




김복희의 평화 플레이리스트


Olivia Ong – Fly Me to the Moon


산울림 –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Whitney Houston – I Will Always Love You




누구든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는 노래들.






☮ Writer | 김복희


시인, 비건 지향, 매일 매일 한정판 냉장고 털기 요리를 만들고 먹는다. 복숭아의 계절 여름을 가장 사랑한다. 요즘 궁리하는 것은 혼자 읽는 것 말고 함께 읽는 것. 혼자서 읽는 것은 그것대로 두면서 함께 더 많이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민 중이다. 그래서 일단 마스크를 끼고서 모르는 사람들과 한 달에 한 번 좋아하는 서점에서 좋아하는 책을 낭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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