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6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타이밍에 새로운 무언가가 생기더라고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믿으면요.
/ 피스트레인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
페스티벌 마케팅을 한다는 것,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연결하는 일이다. 여기, 피스트레인과 여러 브랜드를 사랑으로 이어주던 사람이 있다. 그 누구보다 피스트레인 현장을 즐기던 박지원은 지금은 제주도에 정착했다. 과연 제주도에서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릴레이 인터뷰 에세이 마지막화, 제주도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고 있는 피스트레인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을 '줌(Zoom)'으로 만나보았다.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박지원>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DMZ 피스트레인 1회 2회 마케팅팀장이었던 박지원이라고 합니다. 운이 좋게도 팬데믹 직전에 제주도에 이주하게 됐습니다. 원래 이태원에서 오래 살았는데요. 제주에 여행 왔을 때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 교재를 시작하고 제주도로 내려왔네요.
2007년 즈음 독립해서 남산 주변에서 살았습니다. 처음엔 해방촌에서 살다가, 이태원, 한남동을 거쳐 마지막에는 경리단 쪽에 살았습니다. 이태원에서 클럽에서 활동하는 친구들, DJ 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자주 만나다 보니 혼자 하긴 어려운 일들을 함께하면 쉽고 재밌게 했어요. 저희 집 옥상에서 플리마켓을 진행하기도 했고요. 서울 살 때 재밌는 일들이 많았죠.
어떤 재밌는 일들이 있으셨나요?
의상을 전공했는데요. 20대 초반에 스타일이 특이한 과 선배를 따라서 홍대 클럽을 다녔어요. 밤새도록 음악과 함께 춤추던 클럽에서 만난 형 누나들이 다 노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사회에 나오니 지금은 영화감독, CF 감독, 어디 패션디자인 회사 상무님 등 다 그렇게 됐더라고요. 싹수가 노랬던거죠.(웃음) 사람들로 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댄스 동아리도 했었는데, 그때 동아리 친구들은 강남 나이트를 갔었거든요. 근데 저만 홍대에서 야광봉 들고 춤추고 그랬죠. 정말 순수했어요. 그 씬이 작으니까 한 다리 건너면 다 알고, 지금 활동하는 DJ분들 중에 그때 막 시작한 친구들도 있죠. 지금은 대선배. (웃음)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가 되어있을 때가 아니니까, 오프라인에서 볼 수 있는 비주얼, 영상들에 영감을 많이 받았죠. 클럽에서 만난 친구가 영화감독인데 우리끼리 시사회도 하고, 무엇보다 외향적인 패션이 앞서갔던 사람들이 모여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왜 저러지?’ 싶을 정도로 신선해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 저희는 2021년에 줌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말씀해주시면서 그때 당시로 돌아가 춤을 추고 계신 것 처럼 느껴지네요. 그 시대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신가요?
저는 그때를 잊지 못해요. 특히 하이라이트는 20살 때. 2000년 밀레니얼을 앞두고 세계가 멸망할 거라는 소리도 있었고,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 같았죠. 그런 게 음악으로 응집되어 테크로, 락 등등 활화산처럼 타던 때라, 사람들도 떠다녔던 것 같아요. 저는 그때 막내였으니까 형과 누나들 쫓아다니면서 노는 게 너무 재밌었죠. 홍대는 용광로였어요.
테크노에 빠져서 금요일, 토요일만 기다렸죠. 부모님께는 레이블 파티라고 말씀드리면 오래 걸리고 모르시니까, 홍대 앞에서 해외영상 같은 것도 보여주고 밤새워 공부하면서 패션에 대한 쇼도 보고 자는 공간도 있다고 말씀드렸죠. (웃음) 금요일 저녁에 나가서 일요일 점심에 집에 들어갔죠. 사람들은 제가 홍대생인 줄 알았어요. 크루들이랑 같이 클럽데이처럼 여기저기 찍으며 클럽을 다녔죠. 황금투구 등등 99년에 클럽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그때 테크노 관련 PC통신 모임의 제 닉네임이 단물이었습니다. Sweet Water.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 @본인 제공
<평화로운 제주도의 나날>
제주도로 내려가신 지 2년 정도 되셨다고 하셨는데, 서울에서 친구들을 많이 만나시다가 겨울에 제주도를 내려가셨으면 춥고 외롭기도 하셨을 것 같아요.
코로나가 발발하려던 19년 12월에 내려왔어요. 그때 제가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아서 주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잠적하듯이 왔어요. 혼자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지낸 거죠. 겨울 제주를 접했을 때 상당히 춥고 외로웠죠.
바쁘게 서울에서 일상을 보내시다가 제주도로 내려가신 게 부인분이 계기가 되셨다고요. 제주도에 정착하는데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제주도 여행을 하다가 와이프를 만나게 된 게 계기였죠. 제주와 서울을 왔다 갔다 했는데요. 당시 제가 출퇴근을 할 때가 아녀서, 거의 제주에 있었어요. 일단 마음이 너무 편했거든요. 서울에 오면 생각해야 하는 것도 많고, 안 해도 될 걱정들을 하는 저 자신이 보이더라고요.
그러다가 서울에 있는 집 월세도 아까우니, ‘제주도에 살다가 서울에 일이 있으면 가야지’ 하면서 제주로 내려가자고 결정을 했는데, 서울 집을 뺄 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머리가 복잡해지더라고요. ‘과연 내가 맞는 선택을 한 것인가?’, 어떤 기분에 도취하여 ‘에이 몰라~ 하면서 결정한 것이 아닌가?’,’ 제주도에 내려와서 적응을 못 하면 어떡하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겨울에 내려왔어요.
봄이 되기 전까지는 적응을 못 해서 되게 힘들었어요. 심지어 처음 한 달 동안은 와이프가 인도에 가 있었거든요. 연애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혼자 머릿속으로 막 많은 생각을 했어요. 겨울의 제주는 너무 황량하거든요. 바람도 많이 불고 자연의 따뜻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움츠러들었죠. 그러다 와이프 배 속에 딸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고 정신을 차리게 됐죠. 지금 집으로 이사도 잘하고, 딸 리마 덕분에 많은 것들이 좋아지고 정착하게 된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졌어요.
서울에서 쌓인 독이 좀 빠진 시간이셨다고 느껴지네요.
그렇죠. 그게 한 번에 확 빠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걸리니까. 일로 연결된 상황도 있어서 깔끔하게 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도 했고, 코로나도 심해지기도 했으니까요. 지금은 게르도 운영하고 있어서, 서울에서 친구들이 놀러 와서 더 좋더라고요.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 @본인 제공
게르는 어떻게 운영하게 되셨나요?
제주에 2박 3일 여행 왔을 때 묵었던 숙소가 게르였어요. 제 게르 옆에서 한 달 동안 살던 사람이랑 얘기도 많이 했는데, 바로 지금의 와이프고요. 저한테 게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요. 작년 3월에 지금 이 구좌읍의 황토집을 당근마켓 찾아서 이사를 왔는데, 마당이 넓어서 게르를 하나 두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운이 좋게 당근마켓에 몽골에서 가져온 게르를 판매하시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설치되어있던 걸 철거하고 갖고 와서 저희 집 앞마당에 설치했죠.
제주도에서는 그럼 어떻게 지내시고 계세요? 시골라이프는 어떠신지. 제주도 크리에이터가 되셨다고요?
텃밭도 관리하고, 청소도 하고, 강아지도 산책시켜야 하고, 게르도 운영하고, 드림캐처도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고 유튜브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딸 리마를 낳고 와이프랑 육아를 같이하는데요. 그러다 보니 여기 구좌읍에서 제주시까지 나가기도 출퇴근이 어렵거든요. 다행히 와이프가 판매하는 원석 수공예 일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해 주시고 알려져서, 저는 그 일을 도와주고 집안일도 하고 애기랑도 놀아주면 하루가 금방 끝나서 너무 바쁩니다.
여기서 스스로 돈을 벌만 한 일이 많지 않았는데, 로컬 크리에이터 20명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봤어요. 1000만 원을 지원해준다고 하길래, 마감 2일 전에 제출했죠. 일반인 상대로 하는 사업인데 제가 사업기획서는 워낙 많이 써봤으니까 합격한 거죠. 면접도 보고, 제주도에서 20명을 뽑는 게 아니라 전국에서 20명을 뽑는 거더라고요. 목공 장비를 사서 드림캐처를 더 잘 만들어보려고 해요.
제주도에서 처음에는 힘드셨지만 잘 정착하셨다는 생각이 들고 무엇보다 제주도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이상적인 발걸음이라고 느껴져요. 무엇보다 지금 팬데믹 시국에 평화로운 나날들이시네요.
이 동네에 있으면 집들도 별로 없고, 있어도 많이 떨어져 있어서 대면적으로 사람을 만날 일이 없어요. 심지어 특별한 일 없으면 저도 제주도 시내에도 잘 안 가기도 해요. 코로나와 함께 애기가 태어나서, 150% 정도 집중하다 보니 코로나 데미지가 잘 안 느껴지기도 해요. 서울에 안 간지 1년 2개월 정도 되기도 했고요. 서울은 아주 힘들다고 들었어요.
저도 제주도에 내려오지 않았으면 서울에서 힘들었을 것 같아요. 서울에서 계획하던 일들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갈 수 없었겠죠. 제주에 와서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환경이 바뀌다 보니 또 다른 제 모습을 계속 찾고 있어요. 꼭 팬데믹이여서가 아니라, 저한테도 팬데믹만큼 힘들고 우울했던 시기가 있었는데요. 묘하게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타이밍에 새로운 무언가가 생기더라고요. 많이 산 건 아니지만, 마음이 힘드신 분들은 마지막까지 그리고 마지막 끝에서도 자기 자신을 믿는 게 결국은 후회하지 않는 길이더라고요.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DMZ PEACETRAIN MUSIC FESTIVAL 2021?>
피스트레인 2018년, 2019년도를 함께 하셨죠. 구체적으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2018년도 1회 때가 진짜 짜릿했어요. 2018년 4월 즈음에 예술 감독님이 연락이 왔어요.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이라는 것을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시다고 하셨거든요. 제가 10년 정도 브랜딩 일을 하면서 매체나 브랜드들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많았거든요. 남는 건 그런 거 같아요. 어떤 프로젝트들을 했나 이런 건 잘 기억 안 나고, 누구랑 어떻게 무슨 일을 했다는 게 남는 것 같은데 패션 매거진 중에 하퍼스 바자와 컨택을 해서 편집장님과 이야기를 나눴죠. 그렇게 바자 매거진 7월호 주제를 ‘PEACE & YOUTH’가 되어 1회 라인업인 분들 인터뷰와 화보촬영을 진행하고, 페스티벌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죠. 그리고 배우 유아인님이 표지 모델로 선정되어 페스티벌이 열리기 전에 철원 고석정과 노동당사등등 에서 화보를 찍었죠. 별책도 나오고.
그리고 예전에 제가 디자인 회사에서 있었을 때 리뉴얼 브랜딩 디자인을 진행했던 ‘레드락’이라는 브랜드를 섭외해서 맥주 부스를 크게 만들기도 했죠. 음료수 후원도 받고, 헬리녹스 의자 등등 여러 연결의 일을 했죠.
무엇보다 피스트레인 현장이 정말 재밌었죠. 현장에서는 제가 뭐 마케팅팀장 이런 오거나이저라기보다는 관중들하고 함께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놀았거든요. 제제일 잘 즐기고 싶었던 것 같아요. 도착하는 날부터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100개를 올리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홍보도 하고 그랬죠.
피스트레인 현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으시다면요?
1회 때 글래스턴베리 메인부커이자 피스트레인 설립자인 마틴 엘본과 함께 월정리역에서 진행된 존케일, 강산에 공연을 보는데 정말 훌륭한 페스티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국 BBC에서 촬영도 하고, 정말 글로벌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SCR 분수 무대에서 사람들이 다 같이 물을 맞으며 춤을 추고 있고, 마지막 메인 무대에서 섹스피스톨즈의 글랜메트록이랑 노브레인이 말달리자 공연을 할 때, 여기서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SCR 라디오 운영자 리치와 분수 무대 에프터파티를 진행하자고 했어요. 감독님한테 사전에 말씀을 드리지 않았던 부분인데, 조치를 다 취해놓고 이야기를 드렸죠. 관객분들이 거의 다 귀가한 상황에서 남아계신 분들이랑, 스태프, 뮤지션이 함께 놀았거든요. 뒤풀이 느낌?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하고 재밌었어요.
피스트레인이 끝나고도 여운이 길게 남아서, 귀 뒤에 평화로고로 타투도 받았어요. 저도 언젠가 제주도에서 재미난 페스티벌을 만들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읽고 계실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야기하다 보니 다시 생생하게 생각나고 좋았어요. 지금 이런 팬데믹 상황에서 생각해보니 더 좋았던 것 같네요.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서 오는 희열과 에너지가 필요해요. 당분간은 어려운 상황에서 살고 있는데, 적어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잖아요. 오프라인의 에너지가 좋다는 것을. 빨리 조만간 다시 만났으면 좋겠네요. 딸과 함께 페스티벌에 가서 음악을 듣고 사람을 만나는 현장의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 @본인 제공
P.S 평소에 평화를 어디서 찾으시는지
지금 사는 제주의 분위기가 평화 그 자체긴 한데, 평화를 찾으려면 많은 경험이 필요한 것 같아요. 평화로운 감정과 행복감을 느끼려면 안 좋은 것도 많이 겪어봐야 좋은 것도 아는 것 같아요. 맨날 좋으면, 좋은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죠.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고, 자기가 보는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에 비친 내 모습일 수도 있고, 요새는 여러 가지의 자아들이 존재하니까. 여러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이 직선이 아니라 굴곡이 있는데, 그 굴곡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간 느낄 수 있는 거 같아요. 너무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는 말고 그냥 흐르는 대로 가다 보면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는데, 저는 지금 아이, 예쁜 와이프와 함께 제주에 정착해 가정이 주는 여러 가지 에너지를 처음 느끼는 것이다 보니 좋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이런 행복이 영원하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또 굴곡이 있을 텐데, 아래에 있을 땐 끝인 것 같지만 이제는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완만한 굴곡으로 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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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결국 사랑과 평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세상에 소리에만 귀기울이면, 진정한 내 소리는 언제 듣나? 사랑과 평화, 그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마지막 인터뷰를 마치며 다시 한 번 되새겼다. 3월부터 준비한 릴레이 인터뷰 에세이 대장정 연재는 종료되지만, 피스트레인 열차는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해서 달려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니까.
Love & Peace!
☮ 인터뷰, 글 | 장채영 (피스트레인 콘텐츠 매니저)
☮ 발행 |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페스티벌 마케팅을 한다는 것,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연결하는 일이다. 여기, 피스트레인과 여러 브랜드를 사랑으로 이어주던 사람이 있다. 그 누구보다 피스트레인 현장을 즐기던 박지원은 지금은 제주도에 정착했다. 과연 제주도에서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릴레이 인터뷰 에세이 마지막화, 제주도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고 있는 피스트레인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을 '줌(Zoom)'으로 만나보았다.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박지원>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DMZ 피스트레인 1회 2회 마케팅팀장이었던 박지원이라고 합니다. 운이 좋게도 팬데믹 직전에 제주도에 이주하게 됐습니다. 원래 이태원에서 오래 살았는데요. 제주에 여행 왔을 때 지금의 와이프를 만나 교재를 시작하고 제주도로 내려왔네요.
2007년 즈음 독립해서 남산 주변에서 살았습니다. 처음엔 해방촌에서 살다가, 이태원, 한남동을 거쳐 마지막에는 경리단 쪽에 살았습니다. 이태원에서 클럽에서 활동하는 친구들, DJ 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자주 만나다 보니 혼자 하긴 어려운 일들을 함께하면 쉽고 재밌게 했어요. 저희 집 옥상에서 플리마켓을 진행하기도 했고요. 서울 살 때 재밌는 일들이 많았죠.
어떤 재밌는 일들이 있으셨나요?
의상을 전공했는데요. 20대 초반에 스타일이 특이한 과 선배를 따라서 홍대 클럽을 다녔어요. 밤새도록 음악과 함께 춤추던 클럽에서 만난 형 누나들이 다 노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사회에 나오니 지금은 영화감독, CF 감독, 어디 패션디자인 회사 상무님 등 다 그렇게 됐더라고요. 싹수가 노랬던거죠.(웃음) 사람들로 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댄스 동아리도 했었는데, 그때 동아리 친구들은 강남 나이트를 갔었거든요. 근데 저만 홍대에서 야광봉 들고 춤추고 그랬죠. 정말 순수했어요. 그 씬이 작으니까 한 다리 건너면 다 알고, 지금 활동하는 DJ분들 중에 그때 막 시작한 친구들도 있죠. 지금은 대선배. (웃음)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가 되어있을 때가 아니니까, 오프라인에서 볼 수 있는 비주얼, 영상들에 영감을 많이 받았죠. 클럽에서 만난 친구가 영화감독인데 우리끼리 시사회도 하고, 무엇보다 외향적인 패션이 앞서갔던 사람들이 모여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왜 저러지?’ 싶을 정도로 신선해서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 저희는 2021년에 줌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말씀해주시면서 그때 당시로 돌아가 춤을 추고 계신 것 처럼 느껴지네요. 그 시대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신가요?
저는 그때를 잊지 못해요. 특히 하이라이트는 20살 때. 2000년 밀레니얼을 앞두고 세계가 멸망할 거라는 소리도 있었고, 엄청난 변화가 있을 것 같았죠. 그런 게 음악으로 응집되어 테크로, 락 등등 활화산처럼 타던 때라, 사람들도 떠다녔던 것 같아요. 저는 그때 막내였으니까 형과 누나들 쫓아다니면서 노는 게 너무 재밌었죠. 홍대는 용광로였어요.
테크노에 빠져서 금요일, 토요일만 기다렸죠. 부모님께는 레이블 파티라고 말씀드리면 오래 걸리고 모르시니까, 홍대 앞에서 해외영상 같은 것도 보여주고 밤새워 공부하면서 패션에 대한 쇼도 보고 자는 공간도 있다고 말씀드렸죠. (웃음) 금요일 저녁에 나가서 일요일 점심에 집에 들어갔죠. 사람들은 제가 홍대생인 줄 알았어요. 크루들이랑 같이 클럽데이처럼 여기저기 찍으며 클럽을 다녔죠. 황금투구 등등 99년에 클럽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그때 테크노 관련 PC통신 모임의 제 닉네임이 단물이었습니다. Sweet Water.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 @본인 제공
<평화로운 제주도의 나날>
제주도로 내려가신 지 2년 정도 되셨다고 하셨는데, 서울에서 친구들을 많이 만나시다가 겨울에 제주도를 내려가셨으면 춥고 외롭기도 하셨을 것 같아요.
코로나가 발발하려던 19년 12월에 내려왔어요. 그때 제가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아서 주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잠적하듯이 왔어요. 혼자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지낸 거죠. 겨울 제주를 접했을 때 상당히 춥고 외로웠죠.
바쁘게 서울에서 일상을 보내시다가 제주도로 내려가신 게 부인분이 계기가 되셨다고요. 제주도에 정착하는데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제주도 여행을 하다가 와이프를 만나게 된 게 계기였죠. 제주와 서울을 왔다 갔다 했는데요. 당시 제가 출퇴근을 할 때가 아녀서, 거의 제주에 있었어요. 일단 마음이 너무 편했거든요. 서울에 오면 생각해야 하는 것도 많고, 안 해도 될 걱정들을 하는 저 자신이 보이더라고요.
그러다가 서울에 있는 집 월세도 아까우니, ‘제주도에 살다가 서울에 일이 있으면 가야지’ 하면서 제주로 내려가자고 결정을 했는데, 서울 집을 뺄 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머리가 복잡해지더라고요. ‘과연 내가 맞는 선택을 한 것인가?’, 어떤 기분에 도취하여 ‘에이 몰라~ 하면서 결정한 것이 아닌가?’,’ 제주도에 내려와서 적응을 못 하면 어떡하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겨울에 내려왔어요.
봄이 되기 전까지는 적응을 못 해서 되게 힘들었어요. 심지어 처음 한 달 동안은 와이프가 인도에 가 있었거든요. 연애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혼자 머릿속으로 막 많은 생각을 했어요. 겨울의 제주는 너무 황량하거든요. 바람도 많이 불고 자연의 따뜻함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움츠러들었죠. 그러다 와이프 배 속에 딸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고 정신을 차리게 됐죠. 지금 집으로 이사도 잘하고, 딸 리마 덕분에 많은 것들이 좋아지고 정착하게 된 데에는 크게 문제가 없어졌어요.
서울에서 쌓인 독이 좀 빠진 시간이셨다고 느껴지네요.
그렇죠. 그게 한 번에 확 빠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걸리니까. 일로 연결된 상황도 있어서 깔끔하게 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도 했고, 코로나도 심해지기도 했으니까요. 지금은 게르도 운영하고 있어서, 서울에서 친구들이 놀러 와서 더 좋더라고요.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 @본인 제공
게르는 어떻게 운영하게 되셨나요?
제주에 2박 3일 여행 왔을 때 묵었던 숙소가 게르였어요. 제 게르 옆에서 한 달 동안 살던 사람이랑 얘기도 많이 했는데, 바로 지금의 와이프고요. 저한테 게르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어요. 작년 3월에 지금 이 구좌읍의 황토집을 당근마켓 찾아서 이사를 왔는데, 마당이 넓어서 게르를 하나 두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운이 좋게 당근마켓에 몽골에서 가져온 게르를 판매하시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설치되어있던 걸 철거하고 갖고 와서 저희 집 앞마당에 설치했죠.
제주도에서는 그럼 어떻게 지내시고 계세요? 시골라이프는 어떠신지. 제주도 크리에이터가 되셨다고요?
텃밭도 관리하고, 청소도 하고, 강아지도 산책시켜야 하고, 게르도 운영하고, 드림캐처도 만들어서 판매하고 있고 유튜브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딸 리마를 낳고 와이프랑 육아를 같이하는데요. 그러다 보니 여기 구좌읍에서 제주시까지 나가기도 출퇴근이 어렵거든요. 다행히 와이프가 판매하는 원석 수공예 일이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해 주시고 알려져서, 저는 그 일을 도와주고 집안일도 하고 애기랑도 놀아주면 하루가 금방 끝나서 너무 바쁩니다.
여기서 스스로 돈을 벌만 한 일이 많지 않았는데, 로컬 크리에이터 20명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봤어요. 1000만 원을 지원해준다고 하길래, 마감 2일 전에 제출했죠. 일반인 상대로 하는 사업인데 제가 사업기획서는 워낙 많이 써봤으니까 합격한 거죠. 면접도 보고, 제주도에서 20명을 뽑는 게 아니라 전국에서 20명을 뽑는 거더라고요. 목공 장비를 사서 드림캐처를 더 잘 만들어보려고 해요.
제주도에서 처음에는 힘드셨지만 잘 정착하셨다는 생각이 들고 무엇보다 제주도 이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이상적인 발걸음이라고 느껴져요. 무엇보다 지금 팬데믹 시국에 평화로운 나날들이시네요.
이 동네에 있으면 집들도 별로 없고, 있어도 많이 떨어져 있어서 대면적으로 사람을 만날 일이 없어요. 심지어 특별한 일 없으면 저도 제주도 시내에도 잘 안 가기도 해요. 코로나와 함께 애기가 태어나서, 150% 정도 집중하다 보니 코로나 데미지가 잘 안 느껴지기도 해요. 서울에 안 간지 1년 2개월 정도 되기도 했고요. 서울은 아주 힘들다고 들었어요.
저도 제주도에 내려오지 않았으면 서울에서 힘들었을 것 같아요. 서울에서 계획하던 일들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갈 수 없었겠죠. 제주에 와서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환경이 바뀌다 보니 또 다른 제 모습을 계속 찾고 있어요. 꼭 팬데믹이여서가 아니라, 저한테도 팬데믹만큼 힘들고 우울했던 시기가 있었는데요. 묘하게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타이밍에 새로운 무언가가 생기더라고요. 많이 산 건 아니지만, 마음이 힘드신 분들은 마지막까지 그리고 마지막 끝에서도 자기 자신을 믿는 게 결국은 후회하지 않는 길이더라고요.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DMZ PEACETRAIN MUSIC FESTIVAL 2021?>
피스트레인 2018년, 2019년도를 함께 하셨죠. 구체적으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2018년도 1회 때가 진짜 짜릿했어요. 2018년 4월 즈음에 예술 감독님이 연락이 왔어요.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이라는 것을 하는데, 도움이 필요하시다고 하셨거든요. 제가 10년 정도 브랜딩 일을 하면서 매체나 브랜드들을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많았거든요. 남는 건 그런 거 같아요. 어떤 프로젝트들을 했나 이런 건 잘 기억 안 나고, 누구랑 어떻게 무슨 일을 했다는 게 남는 것 같은데 패션 매거진 중에 하퍼스 바자와 컨택을 해서 편집장님과 이야기를 나눴죠. 그렇게 바자 매거진 7월호 주제를 ‘PEACE & YOUTH’가 되어 1회 라인업인 분들 인터뷰와 화보촬영을 진행하고, 페스티벌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죠. 그리고 배우 유아인님이 표지 모델로 선정되어 페스티벌이 열리기 전에 철원 고석정과 노동당사등등 에서 화보를 찍었죠. 별책도 나오고.
그리고 예전에 제가 디자인 회사에서 있었을 때 리뉴얼 브랜딩 디자인을 진행했던 ‘레드락’이라는 브랜드를 섭외해서 맥주 부스를 크게 만들기도 했죠. 음료수 후원도 받고, 헬리녹스 의자 등등 여러 연결의 일을 했죠.
무엇보다 피스트레인 현장이 정말 재밌었죠. 현장에서는 제가 뭐 마케팅팀장 이런 오거나이저라기보다는 관중들하고 함께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놀았거든요. 제제일 잘 즐기고 싶었던 것 같아요. 도착하는 날부터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100개를 올리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홍보도 하고 그랬죠.
피스트레인 현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있으시다면요?
1회 때 글래스턴베리 메인부커이자 피스트레인 설립자인 마틴 엘본과 함께 월정리역에서 진행된 존케일, 강산에 공연을 보는데 정말 훌륭한 페스티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국 BBC에서 촬영도 하고, 정말 글로벌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SCR 분수 무대에서 사람들이 다 같이 물을 맞으며 춤을 추고 있고, 마지막 메인 무대에서 섹스피스톨즈의 글랜메트록이랑 노브레인이 말달리자 공연을 할 때, 여기서 끝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SCR 라디오 운영자 리치와 분수 무대 에프터파티를 진행하자고 했어요. 감독님한테 사전에 말씀을 드리지 않았던 부분인데, 조치를 다 취해놓고 이야기를 드렸죠. 관객분들이 거의 다 귀가한 상황에서 남아계신 분들이랑, 스태프, 뮤지션이 함께 놀았거든요. 뒤풀이 느낌?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하고 재밌었어요.
피스트레인이 끝나고도 여운이 길게 남아서, 귀 뒤에 평화로고로 타투도 받았어요. 저도 언젠가 제주도에서 재미난 페스티벌을 만들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읽고 계실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야기하다 보니 다시 생생하게 생각나고 좋았어요. 지금 이런 팬데믹 상황에서 생각해보니 더 좋았던 것 같네요.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서 오는 희열과 에너지가 필요해요. 당분간은 어려운 상황에서 살고 있는데, 적어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잖아요. 오프라인의 에너지가 좋다는 것을. 빨리 조만간 다시 만났으면 좋겠네요. 딸과 함께 페스티벌에 가서 음악을 듣고 사람을 만나는 현장의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요.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전 마케팅 팀장 '박지원' @본인 제공
P.S 평소에 평화를 어디서 찾으시는지
지금 사는 제주의 분위기가 평화 그 자체긴 한데, 평화를 찾으려면 많은 경험이 필요한 것 같아요. 평화로운 감정과 행복감을 느끼려면 안 좋은 것도 많이 겪어봐야 좋은 것도 아는 것 같아요. 맨날 좋으면, 좋은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죠. 그때그때 느끼는 감정일 수도 있고, 자기가 보는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들에 비친 내 모습일 수도 있고, 요새는 여러 가지의 자아들이 존재하니까. 여러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이 직선이 아니라 굴곡이 있는데, 그 굴곡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간 느낄 수 있는 거 같아요. 너무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는 말고 그냥 흐르는 대로 가다 보면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는데, 저는 지금 아이, 예쁜 와이프와 함께 제주에 정착해 가정이 주는 여러 가지 에너지를 처음 느끼는 것이다 보니 좋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이런 행복이 영원하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또 굴곡이 있을 텐데, 아래에 있을 땐 끝인 것 같지만 이제는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완만한 굴곡으로 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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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결국 사랑과 평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세상에 소리에만 귀기울이면, 진정한 내 소리는 언제 듣나? 사랑과 평화, 그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마지막 인터뷰를 마치며 다시 한 번 되새겼다. 3월부터 준비한 릴레이 인터뷰 에세이 대장정 연재는 종료되지만, 피스트레인 열차는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해서 달려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니까.
Love & Peace!
☮ 인터뷰, 글 | 장채영 (피스트레인 콘텐츠 매니저)
☮ 발행 |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