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한낮의 산책 / 조소담

2020-07-07



한낮의 산책 / 조소담


 연희동으로 자주 산책을 간다. 산책 레퍼토리가 있다. 버스를 타고 내리면 오래된 동네 빵집 피터팬이 보인다. 그곳에서 여름에만 파는 아이스 크루앙을 산다. 점원이 카라멜이 살짝 묻은 바삭한 빵을 갈라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넣어준다. 그거 하나를 들고 애인과 걸으며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 저기 2층 공간은 사무실 임대하면 얼마나 들까? 저기 연희 프라자 건물에 세 든다고 치면 하수도가 걱정인데. 저기 저 건물은 창이 참 넓고 햇빛이 잘 들 거 같아. 꿈같은 얘기지만 툭하면 우리 사무실 낼 공간을 생각하고 걸으며 이곳저곳 ‘임대' 표지가 붙은 건물을 본다. 내가 탐내는 빈 건물 중 하나는 옛 미술학원 자리인 2층 공간인데, 버려진 석고상들이 창가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나는 거길 지날 때마다 그 석고상들을 째려보며, ‘아직도 임대가 안 나갔잖아?’ 생각한다. 빈 데마다 우리 간판 다는 상상을 해보는 것은, 진짜 거기를 임대하고 싶어서는 아니고, 그냥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재밌어서 그렇다.


 연희동 골목을 또 걷다 보면 멋진 주택이 많이 나온다. 마당과 툇마루 있는 집에 살고 싶단 꿈을 꾸기도 한다. 그걸 어떻게 다 관리하나 싶어 고심한다. (물론 집 살 돈은 없다.) 이렇게 대문이 높은 집들엔 대체 누가 살까 생각하다 여기 어드메에 전두환이 산다지, 생각하고 불쾌해한다. 골목이 갈라지는 길목엔 흑백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작은 사진관이 있다. 거기를 지나 언덕으로 올라가면, 실력 좋고 월세는 없었을 젊은 사장님이 꾸리는 카페가 나온다. 그곳에서 1평짜리 평상 위에 앉아서 화려한 커피를 마신다. 마술처럼 커피에서 무화과 맛도 나고, 꽃향기도 난다. 머리가 치렁치렁한 남자 사장님은 이 커피가 어느 글로벌 대회에서 1등 한 커피라며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 준다. 6천 원짜리 커피 한 잔에서 꽃도 피고 과일도 피고, 연희동 이 작은 평상 위에, 세상에 부러울 게 따로 없다.


 그 골목을 내려와 왼쪽으로 꺾으면 내가 좋아하는 비밀 공간 만화방이 나온다. 입장 전 건물 담장 사이 공간을 꼭 기웃댄다. 그곳에 자주 방문하는 고양이 친구들이 혹시 와있을까 싶어서다. 만화방 주인님은 담장 쪽에 작은 창을 열어두고 고양이들에게 밥을 준다. 사람들 오가는 길에서 밥 먹다 화들짝 놀라 도망가지 말라고, 담장 그늘 아래서 찬찬히 꼭꼭 씹어 먹으라는 배려일 것이다. 나도 불청객이 되지 않기 위해 눈치 보며 담장 옆을 살피고, 밥 먹는 고양이가 있으면 흥분된 마음을 부여잡고 무심하게 지켜 본다. 이런 거리 두기도 나는 사랑이라 믿는다. 일단 나는 만화방에 입장하면 두 시간은 기본이며, 꼭 주전부리를 하고 나온다. (땅콩버터를 넣은 쫄면 메뉴가 지금까진 베스트였다.) 이번 주에는 시미즈 레이코의 명작인 ‘달의 아이' 애장판 완결권을 딱 찍고 나왔다. 만화방 체크아웃을 하는데 완결을 내고 나오니 한껏 의기양양했다.


 논픽션 장르, 현실을 다루는 내 현실의 직업과는 별개로 주말엔 울고 웃고 하며 완전한 픽션 장르, 특히 만화책, 동화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 그 안에서 채울 수 있는 깨끗하고 성숙한 마음의 에너지가 있다. 이번 주 완결을 낸 ‘달의 아이'는 산란기를 맞아 우주 이곳저곳에서 지구로 돌아온 인어들의 이야기다. 인어가 인간을 사랑하면 저주받는다는 동화 ‘인어공주' 속 모티브를 가져왔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운명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만화다. 인어가 인간을 사랑하면 대재앙이 일어나는데, 예지자가 보는 미래 중 하나로 체르노빌 폭발 사건이 나온다. 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인어인 벤자민은 체르노빌 지역의 아이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모습 위로 미래를 겹쳐 보게 된다. 그가 본 미래에서 아이들은 방사능 피폭의 후유증으로 백혈병에 걸려 죽어간다. 이 일은 그가 무언가 행동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이 부분에서 내 마음에 꽂힌 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벤자민이 폭발사고를 원래도 몰랐던 건 아니란 것이다. 아이들을 만나기 전에도 벤자민은 꿈에서 체르노빌 원전이 폭발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그 장면을 목격한 것 자체가 그가 뭔가 행동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만들진 못했다. 어쩌다 우연히 만난 타인일 뿐이지만, 누군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이 예정된 재앙을 바꿔야겠다 결심하게 된다. 두 번째로 꽂혔던 건 내 눈앞에 있는 누군가의 미래를 그가 그림 그리듯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벤자민은 아이들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미래를 생생히 보게 되고, 그 경험으로 마음의 스위치가 눌린다. 내 앞에 있는 구체적인 하나의 존재. 그 존재와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경험만으로도 한순간 ‘어떻게든 이 세상을 바꿔놓아야겠다'하는 결심이 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나는 이런 종류의 스위치가 있다고 믿고 있다. 이 믿음은 내 삶의 여러 부분을 지배하고, 내가 업으로 하고 있는 미디어란 직종과도 연결이 있다.


 나는 내 업의 범위에서, 이 스위치를 가능한 많이 올리고 싶은데, 벤자민처럼 인어도 아니고 초능력도 없으니 누군가의 삶의 구체적 순간을 영사기로 머리 위에 쏴줄 수가 없다. 그래도 현대인의 축복으로, 우리에겐 유튜브(?)와 영상이 있다. 나는 영상을 주 매체로 하는 미디어를 만들고 일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눈앞에서 본다'라는 것은 아주 강력한 경험이고, 사람들의 스위치를 올리기에 영상은 좋은 매체 같다. 하지만 그만큼 누군가 ‘보여지는 일'을 감내해야 하는 이면이 있다. 이 일을 기꺼이 감내하겠다 말하며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을 두고 제작자인 동료들은 이들을 ‘보여지게 하는’ 일을 한다. 고민이 많은 일이다.


'우리에겐 새로운 상식이 필요하다' 닷페이스 ⓒ 닷페이스


 어떤 인터뷰이가 인터뷰 중 감정이 격해져 많이 우신 일이 있었다. 이런 장면을 쓸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토론을 내부 제작자들끼리 하게 되었는데, ‘왜 이 장면을 안 쓰기로 결정했었는지'에 대해 한 피디가 담백하게 이렇게 말했다. ‘인터뷰를 하는데 동의한 것이지, 이 사람이 자신이 오열하는 모습을 내보내는데 동의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결정은 제작자 개인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달력이란 차원에서 각자 판단이 다를 수 있다. 사람들은 보통 ‘눈앞에 그리듯'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데에 에너지를 잘 쓰지 않는다. 힘들고 피곤할수록 그렇다. 최소의 에너지를 써서 타인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메시지가 잘 전달될 수 있을까? 가끔 예능 영상들 중에 산만한 자막을 단 영상들을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당황한 얼굴에 당황이라고 자막을 쓰고, 피곤한 얼굴 위에 피곤이란 스티커를 붙인다. 최소한의 공감으로 인간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얼굴로도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을까. 한 존재와 다른 한 존재가 구체적으로 연결되는 경험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렇게 두 질문을 적어놓고 나니 올해 초에 다녀온 공연이 떠올랐다. 세월호 유가족 두 분이 ‘자기 자신'으로 하고 싶은 일을 도전해보고, 그 과정을 기록하고 시연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다큐 영상과 대본 없는 연극 두 가지가 혼합된 방식의 공연이었다. 첫 번째 공연자로 나선 중년 여성분은 ‘노래 강사'에 도전해 수개월 연습을 했다고 했다. 공연장에선 사람들에게 즉석으로 노래를 몇 곡 가르쳐주셨다. 트로트와 율동으로 장내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박수를 치느라 손바닥이 아플 지경이었다. 중간중간 인터뷰 영상도 함께 나왔다. 노래 강사를 준비하는 일이 어려웠던 속사정이 나왔다. 유가족이란 정체성으로 몇 년을 살다 보니, 신나는 표정도 지으면 안 될 것 같고, 노래하는 모습도 남들에게 보이기 어려웠다고 한다. 무대 위에서의 신나는 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화면 속 그가 이야기했다. 마지막엔 몇 곡을 연이어 같이 따라 불렀다. ‘사랑해, 기다릴게'라는 의미가 담긴 노래 구절을 함께 부를 때는 나도 마음 깊이 사랑을 느꼈고, 눈물이 났다.


 매일 뉴스 보고, 인터뷰하면서 세상 얘기 주워듣고 하다 보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때로는 죄책감이 되고 때로는 분노가 된다. 같이 마음이 멍든다. 여러모로 힘들 때 나는 자주 주말에 연희동을 찾아 걸었다. 내가 골목골목을 꿰고 있는 이유는 이 동네를 오랜 시간 걸어 다녔고 때문이다. 힘들어서 자주 헤매었던 길목들인데, 길을 잃을 때마다 이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을 함께 알게 되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괴로워서 헤매던 시간들에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눈 마주치는 사람들과 동물들이 생겼고, 좋아하는 것들이 생겼다. 평화로워 보이는 이 시간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나 부르게 된 노래 같은 것인지 알고 있다. 노랫말 속에 조금씩 숨겨놓는 아픔과 사랑처럼, 울지 않는 얼굴이라고 해서 꾹 담아놓은 마음 같은 것 몇 개쯤 없을 리 없다는 걸 항상 생각하려고 한다. 타인의 역동적인 삶의 감정들과 너무 깊이는 말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가끔 그걸 알아차릴 정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최소한의 공감만 지닌 인간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위한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 말 못 하는 고양이에게 체하지 말고 밥 먹으라고 좋은 자리에 밥그릇을 놔주는 마음 같은 것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고 믿는다. (눈물)이란 보조 자막 없이도 누군가 울음 참으며 하는 이야기를 차근히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가 서로에게 내어줄 수 있는 평화의 자리가 더 넓어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조소담의 평화 플레이리스트


뭐든 될 수 있을 거야  - 정우

가까운 데서 당신을 잃어도 봤구요. 아주 먼 데서 안아도 봤어요”라는 가삿말을 같이 읊조리다 보면 마음이 슬펐다가 따뜻해진다. 아주 먼 데서도 우리는 서로 안아줄 수 있구나.




도망가자 - 선우정아

도망가도 괜찮다고, 도망가서 ‘나랑 있자'라고 해주는 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자마자, 절망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가 가능해진다.




뒹굴뒹굴 -선우정아

밥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된다고 구박 받았던 언젠가가 생각나는 노래. “원래 소 띠라 괜찮다"니 신박하다.  뒹굴뒹굴하며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서 낮 시간을 보낼 때 너무나 적절한 배경음악.






☮ Writer | 조소담


이야기하는 사람 썸머입니다. 연희동 산책을 좋아하고, 취약하고 잘 휘둘리고 솔직한 사람입니다. 본캐는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의 창업자로, 이 사회에 필요한 새로운 상식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각자 자기가 서있는 자리에서 3M 반경의 원을 그렸을 때, 그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해 연민하고 발견하는 것으로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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