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함께 소리 낼 수 있는 평화로운 공연장을 찾아서 / 이랑

2020-04-07


함께 소리 낼 수 있는 평화로운 공연장을 찾아서 / 이랑


 작년 겨울, 오리사카 유타라는 뮤지션의 단독 공연에서 한 곡을 함께 부르게 되어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도쿄로 향했다. 객석이 1,000석 정도 되는 규모의 도쿄 공연장은 나 같은 인디 뮤지션에게는 매우 커다랗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공연이 열리기 며칠 전에는 커다란 스튜디오에 모여 음향감독, 무대감독, 조명감독 등과 함께 리허설을 했다.


 공연 당일, 거의 마지막인 내 출연 순서가 될 때까지 객석에 앉아 공연을 보기로 했다. 시작 시간이 되자 오리사카 유타가 무대로 나와 의자에 앉았고 나를 포함한 1,000명 가까운 관객들은 그 한 사람을 바라보고 앉았다. 공연이 시작되자 소리를 내는 사람은 무대 위 오리사카 유타 한 사람이 되었고, 그의 노래가 끝나면 조용하던 객석에서 박수로 대답을 했다. 공연 중 대부분의 시간,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매우 조용하게 앉아있었다. 가끔 무대에서 번쩍이는 조명 불빛이 어두운 객석까지 넘어올 때면 동글동글한 머리통들이 붉고 검은 바다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객석 의자가 붉은색이었다) 유난히 조용한 관객들은 리듬에 맞춰 머리를 흔들지도 않고 정말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조용할 수 있을까.


 공연 시간 내내 객석에 앉아 무대보다는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계속 관찰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객석의 소음 차이를 많이 경험했지만 앵콜 타이밍에 앵콜을 외치지 않고 박수만 치는 조용한 일본 객석에는 여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에 비해 한국 관객들은 좀 더 몸을 흔들며 ‘후후’, ‘호호’ 소리를 내지만, 그럼에도 공연 시작 전 관객들이 어둠 속에 앉아 있으면 나는 그 어둠이 너무 무서웠다. 그때마다 공연장 스태프에게 객석을 조금 밝혀달라고 부탁한 뒤 관객들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하면 공연을 시작했다.


 오리사카 유타는 멘트를 거의 하지 않고 노래와 노래를 붙여 연달아 불렀다. 긴 셋 리스트가 순식간에 후반을 향하기에 적당한 타이밍을 노려 객석에서 일어나 대기실로 향했다. 등장 오 분 전 대기실을 나와 무대 옆에서 다시 대기했다. 타이머로 정확한 등장 시간을 재는 스태프와, 그의 기타를 조율하고 있는 내 옆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무대 위로 나가 마이크 앞에 섰다. 무대 위에서 보는 객석은 역시나 매우 넓고 검은 바다 같았다. 멘트 없이 바로 노래를 부를 줄 알고 자세를 잡는데 갑자기 그가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잠깐 동안 서울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했고, 내 얘기에 관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던 그 순간, 검고 조용한 바다에 인격이 생기고 공연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감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정말 좋아한다. 웃음소리만큼 한 사람의 존재를 강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내 두 번째 앨범 《신의 놀이》의 다섯 번째 수록곡 <웃어, 유머에>는 그런 이유에서 만든 곡이다. 앨범 타이틀 곡인 <신의 놀이>의 첫 가사,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에 대한 답곡을 만들고 싶었다. 정답이 아니어도 작은 힌트라도 찾고 싶었다.



매일매일 나가고 웃고 떠들며

선물을 선물하고 또 선물을 받고도

바로 옆에 있는 사람도 잘 모르는데

이 내가 살아있는지 아니면 죽어있는지

큰 소리로 확실히 웃지 않으면 안 돼

뭔가에 반응하는 걸 보여주란 말이야

지금 있는 자리에서 불안하지 않게

여기에 있었다는 걸 확실하게 알리게


이랑 <웃어, 유머에> 가사 중 일부



 앨범에 발표된 버전에는 ‘하하, 히히, 호호, 헤헤’하는 웃음소리와 ‘웃어, 유머에’라는 가사만 넣었지만 초기 데모 버전에는 위와 같이 가사가 있었다. <신의 놀이>에서 질문했던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에 대한 답은 아닐지라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대화를 나누다 서로 웃음이 터지는 순간은 언제나 좋았다.


 《신의 놀이》 앨범을 발표하기 직전, 오랜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49제 때 그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오랜 친구들과 함께 모였다. 슬픈 날이었지만 오래된 친구들과 함께 타고 있던 자동차 안에서는 우리들끼리만 통하는 오랜 말장난으로 몇 번이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두 소리 내어 와르르 웃던 순간, 한 사람의 웃음소리만이 들리지 않는 허전함이 훅 밀려들었다. 들려야 하는 게 당연했던 친구의 독특한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그 날의 경험 이후, 한 사람 한 사람의 웃음소리가 매번 특별하게 느껴졌다.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 살아있다는 걸 상대방에게도 알리기 위해 더 많이 웃고 싶었다. 울고 싶은 기분으로 웃고 싶었다. <웃어, 유머에> 곡을 만들며 우는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웃었다. 공연 때는 웃음소리뿐인 이 곡을 관객들과 함께 불렀다. 어둠 속에서 무대를 바라보던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하하하하하 히히히히히 호호호호호 헤헤헤헤헤’ 소리를 내면 힘이 났다. 외롭고 괴로워 울고만 싶던 시간을 서로 함께 위로하고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Taikou Kuniyoshi


 도쿄에서의 공연을 마친 다음 날, 오리사카 유타의 초대로 도쿄에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체감상 3시간 정도 떨어진) 지역에 있는 한 대안학교 축제에 참가했다. 초중고 나이의 청소년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와 장애인 작업장이 한 건물 안에 모여 있는 작은 규모의 공동체 공간이었다. 학생들과 그들의 학부모, 그리고 작업장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이 각각 부스를 차려놓고 음식과 음료를 팔거나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소품 등을 판매했다. 나는 유타에게 받은 쿠폰 몇 장을 가지고 각 부스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턱시도를 차려입은 지적장애인 바텐더는 내가 주문한 술을 만드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칵테일을 만드는 중간중간 동작을 멈추고 다음 행동을 생각하는 듯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저녁이 되자 체육관 한 구석에 하나의 기타와 하나의 의자를 가져다 놓고 한 사람씩 나와 노래를 불렀다. 나도 나가서 한 곡을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여기저기서 천둥번개가 치는 것처럼 와르르르 갖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큰 소리에 놀랐는지 아기가 울었고, 학부모들은 웃고 떠들며 몸을 흔들었다. 학생들은 노래를 들으러 우르르 몰려왔다가 금방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술에 잔뜩 취한 장애인 작업장 멤버가 한 손에 맥주를 들고 폭주 기관차처럼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모두가 함께 있는 공간은 과연 이렇구나!’


 바로 전날 도쿄의 공연장에서 만났던 조용한 1,000명의 관객들은 ‘모두’가 아니었다. 도쿄 중심에 있는 공연장에 혼자 올 수 있고, 2시간 동안 자기 소리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내가 만나온 관객들도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간 얼마나 제한적인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해왔는지 뒤늦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조용한 객석을 두려워하기만 했지, 조용하지 않은 공연을 만드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가능하면 더 많은 노래를 ‘모두’에 가까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싶다. 무대를 향해 의자가 가지런히 놓인 공연장이 아닌 곳에서 노래하고 싶다. 무대와 객석이 비슷하게 시끄러울 때야말로 제일 평화로운 공연의 순간이 아닐까.




이랑의 평화 플레이리스트

折坂悠太 오리사카 유타、イ・ラン 이랑 - 調律 조율 live recording at 漢江

위 글에 등장한 오리사카 유타라는 일본의 뮤지션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광화문 광장에서 <조율>을 부르는 가수 한영애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한/일 관계가 매우 악화되고 있던 시기였지만 우리는 한강에서 이 노래를 함께 부르기로 했다.



이랑 イ・ラン - 임진강 イムジン河

본인이 부른 버전을 추천해서 조금 민망하지만, 이 곡의 힘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느끼고 싶다.



Arvo Pärt- Spiegel im Spiegel

글 쓸 때마다 틀어놓는 곡이다.




☮ Writer | 이랑


1986년 서울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졸업. 2011년 싱글앨범 「잘 알지도 못하면서」로 데뷔, 2012년 정규앨범 1집 「욘욘슨」, 2016년 정규 앨범 2집 「신의 놀이」를 발표했다. 지은 책으로 『이랑 네컷 만화』, 『내가 30代가 됐다』, 『대체 뭐하자는 인간이지 싶었다』, 『오리 이름 정하기』 등이 있다. 단편영화, 뮤직비디오, 웹드라마 감독으로도 일하고 있다. 이랑은 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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