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기억이 몰려오는 순간 / 윤재원

2020-05-25

기억이 몰려오는 순간 / 윤재원


“소리가 꼭 포탄이 터지는 소리 같아 피난을 가야 하나, 생각했지”


 새벽,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가족들을 깨웠다. 바위가 구르며 내는 소리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셨다. 장마철, 폭우가 내리면 집 뒤의 계곡물은 순식간에 불어나서 거센 물살에 뿌리가 뽑힌 바위가 산 높은 곳에서부터 구르고 부딪히며 우르릉 쾅쾅 소리를 냈다.


 내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때의 여름의 한 장면.


 작년 6월 리허설을 하기 위해 소이산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예고된 날씨였지만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철원의 지질 해설사님을 우연히 산 입구에서 다시 만났다. 지난번 현장 답사 때 우연히 만나 해설을 해주신 분이었다. 그분의 해설 덕분에 대본의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고 메울 수 있었다. 해설사님은 오늘 공연을 통해 여러분이 이 산 주변의 원혼들을 잘 달래달라는 조금은 특별한 안부 인사를 하셨다. 비에 대한 걱정을 하는 우리 일행에게 “비는 내려야지요. 그 간 너-무 가물었어요.” 그렇게 농사와 이곳 주민들을 위해 비는 꼭 내려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홀연히 자리를 떠나셨다. 비는 내려야 했다. 리허설은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함께 공연을 준비한 모두와 늦은 밤까지 고민 끝에 공연을 취소하기로 했다. 사라진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사고의 위험을 안고 진행할 수는 없다는 데에 모두가 동의했다. 무엇보다도 출연자 관람객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 다음날 공연이 예정되었던 시간에 하늘은 환하게 갰다. 결정에 후회는 없었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아쉬움을 마음에 안고 담담하게 집으로 돌아와 자려고 누웠을 때, 대본을 쓰는 동안 떠올렸던 과거의 이야기들, 기억들, 그리고 내가 상상한 이야기 속의 존재들에 대한 생각이 몰려왔다. 아직 관객을 만나지는 못한 나에게만은 생생한 얼굴들, 목소리들. 조금 눈물이 났다.


 처음 철원에 관한 이야기, 소이산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꼭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마도 무너진 것, 다시 볼 수 없는 것을 이야기를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 위에 복원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반짝이는 눈빛을 통해 만난 적 없던 풍경과 얼굴, 목소리가 보이고 들리는 것 같은 순간, 그리고 차마 다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담은 흔들리는 눈빛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보여주는 순간을 마주했을 때 함께 무너지는 마음처럼, 나에게 판타지는 구멍 난 현실을 꿰매고자 하는 노력이 지어내는 순간적인 상(像), 그리고 다른 이에게 이식되는 기억인 것 같다.


Ⓒ 윤재원 / 소이산에서 내려다 본 풍경 


 아래에 지난해 공연을 취소하고 집에 돌아온 나에게 몰려왔던 기억과 몇 차례 철원을 방문하고, 공연을 준비하며 다시 하나둘 떠올렸던 기억의 일부를 함께 적는다.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조용히 숨죽이고 무릎에 얼굴을 가까이 댄다.

- 책상 아래로 몸을 웅크린 채 주변을 본다. 책걸상 사이로 보이는 반 친구들의 모습. 선생님은 왜 책상 아래로 숨지 않고 있을까. 창밖은 고요하다.


돌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무릎에서는 피가 났다.

- 계곡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이 모두 웅성거리며 나에게로 몰려들었다. 무릎에 코를 대면 피 냄새가 선명하게 코로 들어왔다. 계곡물, 이끼의 냄새와 함께 섞여서. 어쩐지 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차가 많이 밀렸다. 오후 늦게 도착한 한탄강 변에서 담임선생님은 둥글게 모여 앉도록 했다.

- 점점 회색으로 어두워지는 하늘. 강은 옥색이고 모래는 하얗고 고왔다. 조금은 축축한 모래 위에서 수건돌리기를 했다. 손뼉을 치고 노래한다. 누구의 뒤에 흰 수건이 놓일까. 내 차례일까. 수건은 내 뒤에 있을까. 흰 수건을 들고 뛰어가는 아이의 발이 모래에 푹푹 빠진다.


“김일성이 죽었다! 김일성이 죽었다!” 

- 모두가 수업 중인 시간. 조용한 복도에 한 아이가 큰소리로 외치며 뛰어간다. 아이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친다. 나무 바닥이 아이의 발걸음에 따라 삐걱거린다. 아이가 뛰어가는 속도에 맞춰 교실의 텔레비전이 하나씩 켜진다.


혹시라도 전쟁이 나면 꼭 걸어서 집으로 와야 한다고 아빠는 당부했다.

- 매일 밤 나는 전쟁이 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잠들었다. 시간이 흐른 뒤에 엄마도 어릴 때 매일 밤 잠들기 전 똑같은 기도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찾습니다’


하얗고 동그랗고 딱딱했던 것이 매미의 번데기인 걸 안 건 나중이었다.

- 7년인가를 땅속에서 있었던 거구나. 무언지 몰라서 무서워서 돌로 눌러버렸는데, 무서운 벌레인 줄 알고 죽인 실수였다고, 후회해 보아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8년 정도 지난 후의 여름, 참매미가 줄어들었다는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반도에 매설된 지뢰를 제거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 500년.


“ 할머니 옛날이야기 해주세요.”

“피난 갈 때는 개미랑 쥐를 따라가면 돼. 쪼그만 개미랑 쥐가 제일 먼저 알고 줄로, 줄로 도망간단다.”


‘실종된 000을 찾아주세요’



Inger Schulstad / 한국 전쟁 당시 의료지원군으로 온 노르웨이의 외과의사 Inger Schulstad가 찍은 사진


 소이산과 철원에 대하여 조사하고 철원에 방문하는 과정은 어린 시절부터 느껴온 아주 작은 불안의 입자들을 연결해 가는 것과도 같았다. 전쟁은 기념관 속 정지되어있는 전투 장면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리고 풍경에 크고 작은 불안의 기억들로 남아 오래도록, 오래도록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맑은 날 소이산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눈앞에 보이는 산과 논이 지나온 시간을 살피다 보면 이 풍경을 아름답다고만 느낄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한순간에 사라진 추억 속 풍경을 흔적으로 추측하며 그려보는 순간을 보내본 사람들에게 이 복잡한 마음은 그리 낯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웃음과 눈물이 타의로 인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죄책감, 부채감이 섞인 마음으로 지나왔던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도 철원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곧 현재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2020년이 되었고 5개월이 지나갔다. 취소와 연기라는 단어는 지난 몇 개월 사이에 일상적인 단어가 되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 한편에는 불안이 자리한다. 페스티벌의 일정이 연기된 지금도 7월에 공연을 할 수 있는 상황일지 한편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다.


 과거의 일로만 여겼던 질병과 싸우는 긴 시간을, 미래의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까. 

 다만 모두가 할 수 있는 한 서로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선택하고 공포를 폭력으로 덮으려 하지 않는 하루하루가 모이기를 바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의 최선의 조심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렇게 이 시간을 잘 지나 보내고 나면, 잘 기억하고, 잘 슬퍼하고, 잘 복구하는 미래가 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우체국 쇼핑몰에 접속해서 채소 꾸러미를 검색하다가, 문득 철원 오대쌀을 검색했다.

“2019년 햅쌀. 적당한 찰기와 은은한 단맛으로 우수한 맛과 품질!”

2019년이면 작년에 내렸던 그 비를 맞고 자란 쌀인 것 같다. 이 4kg의 쌀을 다 먹을 때쯤에는 상황이 좀 더 나아지기를, 여름에는 철원에 갈 수 있기를 바라며 쌀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 Writer | 윤재원


텍스트와 이미지를 다루는 작업을 한다. 단편 다큐멘터리 ‘해 호랑이 소녀 꽃’(2014) 을 만들었다. 공연예술 프로젝트팀 박박parkpark 에서는 영상, 사진, 퍼포먼스 등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포지션을 달리하면서 참여하였다. 전시  미발표 판소리극 ‘성실한 당신’ 의 극본을 담당했다. 전시 ‘기록으로서의 그림’ (2017) 기획하기도 하였으며, 독립잡지  ‘칠’ (2006-2010)의 공동편집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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